[아주스페셜-친일女 1호 배정자①]안중근 의거 때 통곡했다? 민족사를 역주행한 여자

2018-03-1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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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은 임시정부100년, 아주경제 大기획

[들어가며] 아주경제는 내년(2019년) 임시정부100년을 맞아, 오늘을 있게 한 독립투쟁의 활동을 복각하는 연중 대기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남자현 열사와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열사, 그리고 해주기생들을 비롯해 3.1운동에 뛰어든 용감한 여성들에 대해 다뤘습니다. 이번에는 이같은 여성순국열사의 길과는 대조적으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살아간 한 여성에 대해 조망해보려 합니다. 비슷한 시대에 너무나 다른 선택을 한 삶을 살펴봄으로써, 나라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분들의 길이 얼마나 험렬하고 가치있는 실천이었는지를 돌이켜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온 겨레가 억압받는 식민지의 구조적 틀 속에서, 목숨을 걸고 분연히 일어서는 일은 지금 안전한 여기에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친일여성 배정자(왼쪽).배정자를 다룬 영화(1966년)와 속편(1972년).

 
 


◆ 친일女 1호 배정자(1870-1952)
# 세번 웃고 세번 울었다(삼소삼곡 三笑三哭)

이 땅이 낳은 이 여성은 세번 웃고 세번 울었다. 언제 웃었는가. 명성왕후 시해사건 때 웃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흔희작약했고, 고종황제가 눈 감았을 때 쾌재를 불렀다. 언제 울었는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대성통곡했고, 이 나라가 해방됐을 때 주저앉아 오열했고, 해방 뒤 반민재판이 열려 여성친일 1호범으로 붙잡혔을 때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이것은 그녀의 행적을 돌이켜본 사람들의 추정일 수 밖에 없겠지만, 시기시기마다의 처신을 감안할 때 수긍이 가는 대목들이다. 어떻게 조선반도에서 태어난 겨레붙이의 여자가 철저하게 겨레붙이의 희로애락과는 배치되는 길을 역주행하면서 살았을까. 침을 뱉고 욕하며 손가락질 하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그런 손쉬운 비난 때문에 그가 걸어온 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비교적 드물다. 그녀는 요화(妖花, 요망한 꽃)로 불렸고 간첩(조선의 마타하리)으로 지목되었으며 일본 이름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로도 자주 호명된다. 

이 역사적인 반면교사 배정자를 만나러 가자.

배정자의 어린 시절 이름은 배분남(裵粉南, 개똥이)이었다.  1870년 경남 김해 소속의 밀양부 아전(지방공무원)이었던 배지홍(裵祉洪)의 딸이었다. 아버지 배지홍은 흥선대원군과 연관돼 지역의 실세로 군림하던 사람이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시골의 이 집안도 파탄이 났다. 명성황후 민씨가 집권을 하면서 대원군의 실정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됐고 이듬해인 1874년 배지홍은 민씨 일가의 집권에 대해 반의(反意)를 표명했다는 이유로 대구 감영에서 처형을 당했다. 이 때 분남의 나이 4살 때였다.

아버지의 혐의가 역모(逆謨)에 해당했기에 3족이 죽임을 당하는 처지에 처했으나 감면하여 가족들은 노비로 격하되었다. 어머니는 맹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의 형벌이나 충격으로 시력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 눈먼 어머니와 오빠(배국태), 그리고 분남과 남동생. 나라가 버린 이 가족은 구걸을 하며 세상을 떠돌게 된다. 당시의 행적은 보이지 않지만 궁핍과 고난은 안봐도 비디오다. 6년 뒤(1880) 분남은 경남 밀양의 관공서 기생으로 등장한다. 10살의 나이로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팔려온 것이다. 

분남은 계향(桂香)이란 기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 어린 기생은 밤잠을 설쳐가며 사내들의 욕망을 받아내야 하는 고통을 오래 참지 못했다. 기생 계향은 밤중에 밀양의 관청을 뛰어나와 무작정 산길을 걸었다. 허기와 피로에 지친 소녀는 어느 절간 앞에서 쓰러졌다. 그곳이 양산 통도사였다. 때는 1882년 12살 때였다. 통도사에서 분남은 불교에 입문하고 우담(藕潭)이라는 법명을 받는다.

이때의 우담스님 분남에 대한 증언은, 뜻밖에도 불교계의 거목인 구하(九河)스님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 구하는 한국전쟁 이후 15년간 통도사 주지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한때 친일인사로 분류됐다. 조선 일제총독 데라우치에게 150환 짜리(쌀 10가마 값) 은제 술잔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통도사 측에서 구하스님이 독립운동가에게 자금 1만3000환을 몰래 지원한 증거자료(1927년에 쓴 영수증)를 찾아내 공개했다. 이후 이 큰 스님은 독립운동에 가담한 분으로 다시 분류된다.

명필로도 유명한 구하스님이, 그때 헤진 기생복을 입은 채 쓰러져 있던 분남이를 구할 때 함께 있었던 소년이었다. 구하는 10살이었고 분남은 12살이었다. 구하가 통도사로 들어온 것도, 가난에 못견딘 홀어머니가 두 살 때(1874년) 그를 이 절 앞에 내버려두고 갔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신세로 같은 절의 식구가 된 분남에게 소년다운 연민과 동경이 가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구하는 누나뻘인 분남과 계곡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구하는 눈부시게 예뻤던 용모와 고집이 세고 체격은 야무지며 말투와 행동은 거칠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이상국 아주T&P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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