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유준상(왼쪽)과 왕용범 뮤지컬 연출가가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배우 유준상과 뮤지컬 연출가 왕용범은 둘이서만 함께 뉴욕 여행을 갔다 올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2009년 뮤지컬 ‘삼총사’로 첫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 ‘프랑켄슈타인’, ‘벤허’ 등에서도 연출과 배우로 호흡을 맞추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10주년을 맞은 ‘삼총사’지만 그 시작이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왕용범은 연출치곤 어린 나이였고, 대극장 공연을 책임지고 진행한다는 게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그때 함께했던 유준상, 민영기, 김법래 같은 배우들도 선배였을 뿐 아니라 기(氣)로는 어디 가서도 눌리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의 한 카페에서 만난 왕용범 연출은 당시를 떠올리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사람을 관리·감독하는 거였다. 사람이 좋다 하더라도 능사는 아니지 않냐”면서 “그때 준상 선배가 믿어줘서 ‘삼총사’가 잘 올라갔던 것 같다. 첫 공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삼총사’에 의구심을 가졌는데, 선배의 응원 덕분에 그런 의심이 적어졌다”고 유준상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왕용범 연출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실제로 왕 연출은 공연 당시 퇴근 후 집에 가면 온몸이 칼에 베인 것처럼 몸살이 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잠을 자다가도 새벽 3, 4시면 깨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 기 센 배우들 사이에서 으레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였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됐다.
왕 연출은 “아무리 감당하기 힘든 프로젝트를 맡더라도 준상 선배와 함께라면 초연이라도 외롭지 않게 할 수 있다. 워낙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삼총사’에선 사랑에 상처 받은 검객, ‘프랑켄슈타인’에선 광기 어린 인물, ‘벤허’에선 휴머니즘을 연기할 수 있다. 작품마다 색깔을 읽는 배우”라며 유준상을 극찬했다.
왕 연출이 유준상에게 갖고 있는 신뢰만큼 유준상 역시 왕 연출에게 갖는 믿음이 크다. ‘삼총사’가 처음 10주년 공연을 올린다고 했을 때도 유준상의 한 가지 생각은 확고했다. 이번에도 연출은 왕용범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준상은 “왕 연출이 아니면 안 됐다. 다른 연출가가 한다면 따라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왕 연출이 만들어 놓은 많은 것들을 다른 사람이 흉내 내는 것밖에 되지 않아 괴로웠다”면서 “결국 왕 연출이 이번 작품을 하게 됐는데, 10주년이라 더 완벽한 공연을 위해 작은 부분까지 고민하고 고치는 과정을 보면서 ‘역시 왕 연출’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뿌듯해했다.
10주년이란 숫자에 대한 의미보다 왕 연출은 ‘삼총사’가 가져다 준 당시 뮤지컬 시장의 변화에 주목한다. 해외 라이선스 작품을 한국으로 들여와 단순 소비하던 시절에 ‘삼총사’는 외국의 작품을 그대로 올리지 않고 우리 방식대로 새롭게 재창작하기 시작한 첫 작품이란 게 왕 연출의 생각이다.
그는 “‘삼총사’도 해외 라이선스 작품으로 한국에 들여왔지만 우리가 재창작했다. 그렇게 재창작된 작품이 원작자에 영향을 줬고 우리 버전의 작품이 일본에서 공연돼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후로 많은 해외 라이선스 작품이 들어왔지만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고, 오히려 한국 버전이 원작자의 나라에 수출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 유준상(오른쪽)과 왕용범 연출[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10주년인 만큼 공연 일부도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관객의 관람 템포(시간), 무대 기술의 유행도 바뀐 만큼 관객의 눈높이에 맞게 수정될 전망이다. 특히 삼총사 중 한 명인 포르토스는 최근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 기존의 마초적인 면모가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왕 연출은 “이전 ‘삼총사’에서 포르토스는 여자를 좋아하고 밝히는 이미지로 그려졌다. 10년 전에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지금은 비호감”이라면서 “굳이 여자를 밝히는 것이 마초일까에 대해 고민했다. 힘을 강조한다든지, 우악스러움 속에 숨겨진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이 관객 입장에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부분일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마초란 단어가 나오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최근 문화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으로 확산 중인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공연계에 몸을 담고 있는 왕 연출과 유준상도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왕 연출은 “공연이란 것이 사회의 환상이라고 하지만 사회의 거울이 될 때도 있다. 우리의 언어로 영혼을 갈아 넣는다고 할 정도로 감정노동, 육체노동이 심한 게 무대 예술인데 선의의 피해자들이 생기고 있다. 공연 자체엔 돌을 던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어 “공연계에서 주연 배우는 높은 사람이고 앙상블은 낮은 사람이란 개념은 계속 바뀌어왔다. 서로 존칭하고 존중하는 모습들이 있어 왔다”면서 “이전까지 그런 노력이 전혀 없다가 이번에 노력하자는 게 아니다. 계속 노력해 왔기 때문에 더 노력해야 한다. 공연계뿐 아니라 서로 존중해야 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우 유준상[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한편, 이번 공연에는 초연 흥행 돌풍의 주역으로 평가받는 신성우, 엄기준, 유준상, 민영기, 김법래가 모두 캐스팅됐다. 그중 엄기준, 유준상, 민영기, 김법래는 ‘엄유민법’이란 그룹 이름으로 별도의 콘서트를 열 정도로 관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유준상은 “10년 전에 같이 보고 웃었던 대사는 지금 봐도 서로 웃는다”면서 “집에서 혼자 대본 연습을 하다가 눈물이 나더라. 10년 전 함께 공연을 하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이제 이 작품을 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구나’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먹먹한 심정을 전했다.
10년이란 시간으로 체력적으로 힘에 부친다는 유준상은 “다행히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삼총사 모두가 힘들어한다. 칼싸움 하는 걸 보고 있는데 짠하더라. 앙상블 배우들은 20대인데 그 친구들과 칼싸움을 하는 삼총사가 안타까웠다”고 웃어보였다.
뮤지컬 ‘삼총사’ 10주년 공연은 오는 16일부터 5월 27일까지 서울 한전아트센터에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