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제9회는 방송 활동하며 글쓰는 DJ, 래피 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름은 래피입니다. 수상 경력으로 2000년에는 엠넷 프리스타일 랩배틀대회 우승이 있고 2005년에 1집 앨범(Do you knoow?)으로 데뷔했습니다
'직'은 곧 점유하고 있는 직장 내 담당 업무이며, 내가 아닌 누군가로 쉽게 대체가 가능합니다. 시간이 가면 결국 퇴직으로 끝나지요. 반면 '업'은 평생을 두고 매진하는 주제입니다. 업은 쉽게 다른 누군가로 대체하기가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연륜이 쌓이며, 업은 결국 장인정신과 연결됩니다.
[질문2] 해당 직업 내에서 어떤 일을 주로 하는 것인가요?
현재 SBS 라디오 김창열의 올드스쿨 주말 코너 <래피의 드라이브 뮤직>, TBS 교통방송 라디오 배칠수 전영미의 9595쇼 주말 코너 <래피의 리믹스 파뤼>, 경인방송 라디오 임희정의 고백라디오 <그때의 우리> 고정 출연 중이고요, 그외 TV와 라디오, 팟캐스트 등 여러 방송에 프리랜서로 활동 중입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175곡이 등록되어있는 작사, 작곡가입니다. 강사 에이전시 업체인 달꿈과 함께 전국 초, 중, 고등학교에 멘토링 특강과 명사특강을 주로 하며, 대학생이나 기업, 공무원 상대로는 힙합(랩)을 통한 인문학이란 주제로 강연을 합니다. <힙합 프로젝트>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며, 현재는 에세이와 동양철학 해설서를 동시에 집필 중입니다.
[질문3] 최종적으로 이 직업을 선택하게 된 배경 또는 사유 등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1992년, 고등학교 2학년 때 Rock 밴드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에 빠져들었습니다. Rock 뮤지션의 꿈을 꾸던 저를 막아선 건 아버지라는 큰 산이었습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던 셈이지요.
1992년에 경남 진주에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시내에 나서면 모든 사람들이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쳐다봅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그런 시선들이 좋기만 했어요. 하루는 아버지한테 찢어진 청바지를 들키고 말았습니다. 원래는 무릎 부위만 찢어져있던 청바지를 아예 다 찢어버리시더라고요. 따진다고, 반항한다고 될 일은 아니잖아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야겠다. 정정당당한 모습으로 떠나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 그때부터 저는 하루에 3시간만 자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Rock 밴드 역시 연습할 곳이 없어 비닐하우스에서 연습하면서 '이대로는 안되겠구나, 진주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죠.
저는 수능 1세대입니다. 수능 1세대는 수능을 8월에 한 번, 11월에 한 번, 두 번을 봐서 둘 중에 잘 나온 점수와 내신성적을 합해 대학교를 가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우선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저는 방학 때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내내 서울대 도서관에서 지냈지요. 그렇게 미친 듯이 1년을 보내고 결국 저는 경희대 섬유공학과 94학번이 되었습니다. 원했던 학교나, 원했던 학과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진주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죠. 저는 경희대 진학과 동시에 들뜬 마음으로 교내 Rock 동아리 '탈무드'를 찾아가서 오디션을 봤지만 '사투리가 너무 심하다는' 충격적인 이유로 탈락하게 됩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몰랐다가 그 동아리에 있던 친구로부터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사투리 때문에 떨어진 거라고.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정말 충격이었죠. 그때부터 저는 1년 내내 술과 음악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친구들과 술 먹고, 놀러 다니고, 노량진 '머키 레코드'에 가서 테이프 사 모으는 재미로 지냈습니다. 그땐 분노가 쌓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주로 스래시 메탈이나 데스 메탈 쪽에 빠졌었어요. 그렇게 94학번 새내기의 1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고 12월이 되어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군대에 입대 신청을 했어요.
그렇게 첫 겨울 방학을 맞은 제가 새롭게 도전한 일은 뜻밖에도 DJ였습니다. 진주에 있는 선배로부터 가게에 DJ가 없으니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는 소위 'Rock 부심'이 대단했던 시기라 음악적 편견이 매우 심했었기에 탐탁치 않았던 제의였지만, 어차피 군대 가기 전까지는 용돈벌이도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DJ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매드 월드'라는 가게는 진주에서 큰 화제를 불러 모으며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는데, 진주 출신의 당시 세대들 중에는 '매드 월드' 모르면 간첩이죠. 제게는 매드 월드에서의 그 시간들이 가요부터 팝까지 그동안 편견을 갖고 잘 듣지 않던 음악들을 다양하게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Rap과의 만남이 바로 매드 월드에서 이루어졌기에 1994년 겨울이 제게는 큰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랩을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슴에 간직한 채, 저는 95년 4월에 강원도 화천으로 입대를 하게 됩니다. 6주 훈련을 다 받고 나니 40명이 전투경찰로 차출이 되고, (지금은 전투경찰 차출 제도는 없어지고, 의무경찰만 있어요.) 충주 경찰학교로 내려가 다시 4주간 시위 진압훈련을 받고 전투경찰로 복무했습니다. 그 후 97년 6월에 제대할 때까지 저는 힙합 음악에 무섭게 몰입했습니다. 제대와 동시에 이번에는 제 발로 다시 매드 월드를 찾아갔고, 복학 전까지 DJ를 하며 본격적으로 외국 랩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98년에 다시 복학을 하고 나니까 저처럼 미친 사람이 공대 건물에 또 한 명 있더라고요. 그 친구 이름은 니노(a.k.a 니노리바, ninoliba)인데, 소니뮤직을 거쳐 지금은 CJ 엠넷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암튼 저는 섬유공학과, 그 친구는 기계공학과였습니다. 두 미친 사람이 98년에 그렇게 만나서 경희대 최초의 힙합 동아리 <래빈>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후 중앙동아리 승격 및 동아리 녹음실과 각종 장비 등을 구입하는 노력과 비용은 저와 니노리바 등이 홍대 클럽과 동대문, 시장바닥까지 닥치는 대로 공연을 다니며 모은 돈으로 해결했어요. 그러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힙합 방송인 m.net <힙합 더 바이브>와도 인연을 맺게 되어 프리스타일 랩 배틀 코너도 진행하게 되고, K-Coast Story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에서 타이틀곡을 맡아 활동하게 된 '셰익스피어'라는 팀으로 2001년에 데뷔를 하게 됩니다. 지금의 홍대여신 요조가 그땐 저희 팀에서 래퍼 겸 보컬이었어요.
이런저런 이유들로 '셰익스피어' 활동을 접게 되면서 방황 끝에 프로듀서로 전업을 결심한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장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현우 콘서트 랩 객원, 랩 가사 대필, 랩 세션, 작사, 작곡, 편곡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와중에 2004년에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는데요, 바로 DJ 처리, 신철 선배님이었습니다.
"래피야, 형이 SBS에서 라디오를 진행하는데 네가 좀 와야겠다."
그렇게 전설적인 <크로스오버> 코너가 탄생되는데, 바로 트로트와 랩의 접목이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운전 기사분들과 라디오 애청자들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트로트와 랩의 크로스오버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나비효과를 타고 저는 직접 트로트 곡을 발매하기도 하고, 고속도로 메들리를 녹음하기도 하고, 이승철, 정수라 같은 대 선배님들과 랩 객원으로 전국 투어를 다녔으며, 평생에 한 번 서볼까 말까 한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 무대를 송대관, 설운도 선배님 덕분에 여기저기 다 서봤습니다. 장윤정과 '어머나' 랩 버전으로 활동할 때는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 무대도 섰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저는 SBS 라디오 <김창렬의 올드스쿨>이 생기면서 지금까지 12년째 드라이브 뮤직 코너로 함께하는 중입니다.
점을 이어가다 보면 선이 된다고 하잖아요. 제 경력이 산만하고 쓸데없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Rock 밴드 생활을 하며 음악적 기초를 쌓은 것, 힙합 그룹을 하며 좌절과 설움을 맛본 것, 랩 세션맨 생활을 하며 다양한 가수와 제작자를 접하고 즉석에서 수많은 랩 가사를 썼던 것, 장르 가리지 않고 곡 작업을 하면서 스펙트럼을 넓혀온 것, 방송을 하며 익힌 눈칫밥과 마이크 앞에서 말하는 법 등이 큰 도움이 됐어요. 이 모두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근본이 되는 것들이거든요.
우선은, 책입니다.
사람들이 TV 드라마와 예능에 깔깔대며 집중할 때, 저는 묵묵히 책을 읽습니다. 읽고 또 읽으며 쓰고 또 씁니다. 모두가 같은 가사를 쓸 때 저는 다른 가사, 다른 제목을 생각합니다.
모두가 같은 주제로 곡을 쓸 때, 저는 저만의 느낌으로 다른 방식을 연구합니다. 모두가 하나의 장르와 틀 속에 갇혀있을 때, 저는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틀을 깨부수려고 노력합니다.
모두가 같은 톤으로, 같은 목소리로 방송을 할 때, 저는 저만의 투박함과 개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모든 DJ가 으시대고 뽐내며 한 장르의 음악만을 틀어댈 때, 저는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저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장르와 시대의 노래들을 선곡해 정곡을 찌릅니다.
그것이 저의 전략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TV를 없애버린 채, 운전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책을 읽기 위해 주로 전철을 이용합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식당에서 밥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먹는 동안에도, 걸을 때도 시간이 아까워 글을 읽습니다. 방송이나 행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할 때는 차에서 오디오북을 듣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음악을 만들거나, 방송을 하거나,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단 1초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매 순간을 글과 함께 합니다. 활자 중독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를 다르게 만들었고, 탁월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저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세계 전체가 결국은 책으로 지배되어 왔다고 한 볼테르의 말처럼 제가 이룬 모든 것은 활자로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던 마틴 발저의 말처럼 제 차별화 전략 역시 활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은, 사람입니다.
인문학이란 결국 사람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발표하는 저의 모든 작품은 다 협업입니다. 저는 '혼자 잘난 사람' 대신에 인간 플랫폼이 되기로 했습니다. 모두를 연결하는 연결고리, 인간 플랫폼. 하여 저는 요즘 의뢰받는 모든 일들을 후배들과 동료들에게 나눠주며 함께 합니다.
모든 일거리와 그에 따른 영광을 혼자 독식하려고 기를 쓰고 달려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요.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혼자서 차지하려 하면 후에 반드시 독이 됩니다. 나누고 함께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험하고 힘든 세상, 사람들과 함께 가면 편합니다.
또, 작년부터 저는 연말에 인문학과 맥주가 만나는 <'인맥' 놀이터>라는 모임을 운영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오붓하게 모여 네트워킹하는 파티를 좋아합니다.
토포악발(吐哺握髮), 이는 '어진 인사들이 찾아오면 먹고 있던 음식을 뱉고 감고 있던 머리를 거머쥐고 맞이한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결코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겪은 일들의 집합입니다. 만난 사람과 겪은 일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결국 나를 구성하지요.
''기욕립이립인(己欲立而立人), 기욕달이달인(己欲達而達人)''
'내가 어느 곳에 서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 먼저 그곳에 설 수 있게 하며, 내가 어느 경지에 도달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 먼저 도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관계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을 다음 사람에게 옮깁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지요.
[질문5] 혹시 이 직업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특별한 위기가 있었다면 어떤 위기이고,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특별한 위기가 아니라, 매 순간이 위기입니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복잡계입니다. 예측 시스템이 없어요. 세상은 결코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옵션이 아니라 디폴트 값이에요.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폴트 값을 잘못 설정해놓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될 것이다."라는 전제입니다. 세상이 왜 당신 뜻대로 되어야 하나요? 세상이 당신 뜻대로 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내 자식도, 내 형제도, 내 부모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이에요.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이처럼 죽음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이를 내면화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죽음을 덜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실패 따위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로부터 더 이상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되지요.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욕쟁이 할머니 가게에 가서 욕을 들었다고 해서 할머니와 싸우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저 할머니는 원래 욕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이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디폴트의 힘이에요.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문학자인 미셸 몽테뉴는 말했습니다.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대신 스스로의 생각을 통제할 수는 있어요.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내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이 세계는 우연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이든 사람이든 내 뜻대로 안 될 때, 누구를 탓하거나 절망하거나 그만둘 것이 아니라, "아 그렇구나"하고 실패를 인정한 후, 다시 도전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래피의 '구나 구나 법칙'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냥 두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면 됩니다. 하여 인생에는 방향 전환이 꼭 필요합니다.
인생이란 결국, 매 순간의 합(合)이에요. 다 갖지 못해도, 다 이루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과정인데, 도전하는 과정에서 즐거웠다면 그걸로 그만입니다. 방향 전환과 좌절, 그 경험을 통해 제가 얻은 노하우는 이렇습니다.
"'재미있겠다, 잘 할 수 있겠다' 싶은 일은 일단 해보세요. 먼저 발을 내딛어 담궈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저지른 뒤, 아니다 싶으면 방향을 전환하고 이거다 싶으면 최대한 끝까지 버티세요. 올림픽 종목에서 인간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 앞설 수 있는 종목이 바로 마라톤입니다. 젖은 낙엽처럼 끝까지 버티는 자가 이깁니다."
살면서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요? 막상 꼽아 보면 생각보다 적습니다. 인생의 중대한 사건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태어나는 일부터 그렇지요. 우리는 부모나 나라를 택할 수 없지만, 어디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시험, 취직, 연애, 결혼 등 중요한 통과 의례 역시 적절한 상황과 운이 따라 줘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을 말할 때 '운'을 제일 먼저 들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공에 운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아는 게 당연합니다. 인생이란 '노력과 의지'라는 씨줄과 '세상의 흐름(운)'이라는 날줄이 만나 직조되는 것입니다. 노력이 기회를 만나게 되면 그게 바로 '운'이 되지요.
[질문6] 많은 사람들이 음악분야에서 준비하고 있는데요, 급여나 수입에 대해 여쭤볼게요, 해당 직업군에 대한 평균적인 급여수준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냉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평균이 없습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극단적인 예가 바로 이 분야라고 보시면 됩니다. 승자독식 구도가 기본 원리인 곳에서는 딱 두 가지 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됩니다. 넘버 원과 온리 원, 즉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거나, 아니면 최초가 되는 것. 온리 원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 물어봐야 합니다. ''왜?''라고.
''물어볼게요. 하고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유독 당신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차별화 전략이 있나요? 탁월함은요? 그게 없다면 대체 왜 꼭 당신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질문7] 이 직업을 갖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을 부탁드려요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자기 뜻만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마세요.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수많은 실패와 부조리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건 마치 파도를 타는 서퍼와 비슷합니다. 서퍼는 '왜 내가 원하는 파도가 밀려오지 않느냐?'며 짜증내거나 화를 내지 않고 그때그때 몰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스릴을 즐기지요. 우리도 인생의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무작정 최상의 조건을 기다리기보다는 일단 바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단 저질러 봐야 합니다.
모든 선택은 그로 인한 포기를 동반해야 하고, 그 포기는 '기회비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 능력의 한계로 인하여 선택이 불완전하기 쉽고, 그래서 역사의 발전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필요로 합니다. 이 세상에 과연 100퍼센트 확실한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과학 지식조차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쓴 이유로 1633년에 종교 재판까지 받았듯이 예전에는 천체의 모든 별과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을 한다고 믿었고 그것이 정상과학이었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면 진리일 것만 같던 과학적 지식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지금은 누구도 천동설을 믿지 않습니다. 모든 진리는 절대적이지 않고 잠정적이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습니다. 그러니 뭐든 시도해 보십시오. 인생에서 실패를 겪지 않을 단 하나의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체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이를 뉴턴의 운동 제1법칙이라고 하는데, 관성의 법칙(the law of inertia)이라고도 합니다. 관성이란 그냥 그대로인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에 힘을 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가 없다는 뜻이지요.
아무것도 안 하면 실패는 없겠지만 이룰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체 게바라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쿠바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성공보다 더 많은 실패를 했어요. 이상적인 인간은 성공의 여부, 대중의 평가, 혹은 사회의 인정과는 무관합니다. 그런 사람은 각자 자기 세계의 범위 안에서 영웅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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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9회로 참여한 래피님의 멋진 활동을 응원합니다.
더불어서 청년 활동가 여러분들도 언제든지 참여해보세요.
앞으로 김정인과 사람들의 인터뷰와 함께할 수 있습니다.
[ 한국의 미래는 청년이 답이다 - 버터플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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