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제5회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입장하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겨울스포츠 변방 국가에서 개최국이 된 우리나라의 동계올림픽 역사는 말 그대로 ‘무(모)한 도전’의 역사였다.
첫 동계올림픽 참가는 광복 후 지금부터 정확히 70년 전인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태평양을 건너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참가한다. 한국이 광복 후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다. 당시 최용진 국가대표팀 감독은 출국 전 밝힌 포부에서 “이번 대회에서는 경기에서만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참된 조선의 모습을 널리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동계올림픽 도전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우리나라 대표팀은 1952년 열린 제6회 노르웨이 오슬로동계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다. 6·25전쟁 때문이었다. 하지만 1956년 열린 이탈리아 콜리나단페초 대회부터 1988년 캐나다 캘거리대회까지 빠짐없이 출전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벽을 넘지 못한 우리나라 대표팀 선수들은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위로의 말과 함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김기훈(가운데)과 동메달을 획득한 이준호(오른쪽)의 모습. [연합뉴스]
그 뒤로 절치부심한 우리나라는 1992년 제16회 프랑스 알베르빌대회에서 첫 금메달을 획득하며 종합 10위를 차지한다. 동계올림픽 참가 44년 만이었다. 쇼트트랙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파란을 일으켰다.
남자 1000m에서 김기훈은 1분 30초 76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 신기록이었다. 이준호도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어 김기훈과 이준호는 남자 5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역시 세계 신기록이었다.
이후 쇼트트랙은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수확하는 데 있어 효자종목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94년 릴레함메르에서 금메달 4개, 1998년 나가노에서 금메달 3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했다. 특히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선 안현수(빅토르 안)와 진선유가 각각 3관왕에 올랐고, 2010년엔 이정수가 2관왕을 차지했다.
2014년 소치대회에선 여자 3000m 단체전과 여자 1000m에서 박승희가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한국은 쇼트트랙이 동계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나온 144개의 메달 중 42개(금메달 21개, 은메달 12개, 동메달 9개)를 싹쓸이했다.

우리나라 최초 피겨스케이팅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가운데)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우리나라는 집중적인 인재 발굴과 투자를 통해 금메달을 수확하는 종목도 다변화했다. 제21회 캐나다 밴쿠버올림픽이 대표적이다. 쇼트트랙뿐만 아니라 체격과 힘의 열세로 서양인보다 불리한 것으로 알려졌던 스피드 스케이팅 부문에서 이승훈과 모태범, 이상화가 금메달을 잇달아 수확했다. 또 김연아가 한국선수로는 처음 피겨스케이팅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우리나라가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 5위를 거두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계올림픽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선수단을 꾸린 우리나라는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8개, 은메달 4개, 동메달 8개 등 20개의 메달로 종합 4위를 노리고 있다. 역대 동계올림픽 사상 가장 높은 순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