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7일 개봉하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감독 최성현)은 주먹만 믿고 살아온 한물간 전직 복서 조하(이병헌 분)와 엄마만 믿고 살아온 서번트증후군 동생 진태(박정민 분)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살아온 곳도, 잘하는 일도, 좋아하는 것도 다른 두 형제가 난생처음 만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에서 배우 이병헌(48)은 조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이병헌의 말처럼 ‘그것만이 내 세상’ 속 조하의 모습은 요즘 관객들에겐 낯선 이병헌의 면면을 담은 인물이다. 주먹 하나 믿고 평생을 살아왔지만, 지금은 자존심만 남은 한물간 전직 복서인 조하는 카리스마를 벗고 친근함을 입은 채 관객들을 맞게 됐다. 때론 모자라고 허술하지만 단단하고 강직한 면을 잃지 않는 조하는 과거 SBS 드라마 ‘해피투게더’(1999) 속 무명 야구선수 태풍이 스치기도 한다.
“조하는 결핍과 상처를 가진 남자예요.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은 모두 결핍이 느껴지는데 연기를 하기에 앞서 ‘이런 결핍들이 보이는 게 맞을까? 아니면 안 보이는 게 맞을까?’ 하는 고민을 했어요. 아주 어릴 적, 아이가 겪기엔 너무 큰 트라우마를 겪었는데 이게 상당히 과거의 일이잖아요? 엄마 없이 성장했고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강조되지 않고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병헌은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결핍’의 일례로 자신을 버린 엄마를 17년 만에 만나게 된 순간을 짚었다. “드라마틱한 음악이 흐르고 고속 촬영이 되는 등 드라마가 강조되는 만남이 아닌” 건조한 모자(母子)의 재회였다.
“일상처럼 조하와 엄마가 만나게 되고 또 엄마의 집에 얹혀살게 되는 과정이 더 진짜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상처와 트라우마는 조하의 안에 크고 넓게 자리 잡고 있겠지만 그게 처음부터 태나게 보이는 것보다 켜켜이 묵혀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를 바랐어요.”
이병헌의 말처럼 ‘그것만이 내 세상’은 통속적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담백하고 건조한 화법으로 더욱 뭉클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끌어낸다. 이병헌이 오랜만에 ‘가족 드라마’ 장르를 찾은 것 또한 바로 이 지점 때문이었다.
“주관적인 건데 저는 ‘그것만이 내 세상’ 속, 코미디나 슬픈 장면이 ‘선’을 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판단했을 때는 ‘아, 이거 되게 괜찮다. 제법 재밌고 웃긴데다가 감동도 눈물도 있다’고 판단한 거죠. 그게 상당히 애매한 ‘선’인데 제 판단에는 그 ‘선’을 잘 지킨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부터 연출까지. 최성현 감독의 ‘선’은 분명했다. 제작사 JK필름이 추구하는 따듯하고 서정적인 감성을 품되 상업영화로서의 재미도 잃지 않아야 했고, 너무 ‘통속적’으로 보이지 말아야 했다.
“‘선’을 지키기 위해 연기적으로도 많이 고민했어요. 상업영화기 때문에 작품성과 표현 방법에서 오는 갈등과 딜레마인 거죠. 예컨대 이 작품이 희망적이고 행복하게 엔딩을 맞아야 하므로 제가 생각하는 조하의 감정과 어긋나게 될 때가 있어요. 실제라면 조하와 진태를 유일하게 이어주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서번트증후군을 가진 동생을 맡게 되었는데 아주 조금 가까워지긴 했어도 그 친구를 책임질 수 있을까? 어깨가 무거웠으리라고 봐요. 장례식장 신도 그랬어요. 갑작스레 사라진 진태를 찾다가 대학로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진태의 모습을 보며 고민에 젖어 있다가 아주 나중에서야 흐뭇한 얼굴로 변하도록 연기 했거든요. 그런데 편집하는 과정에서는 ‘행복’하게 끝을 맺어야 하니까. 그런 지점의 고민과 갈등이 있었죠.”
코미디를 아우르는 작품인 만큼 애드리브도 많았다고. 하지만 이병헌은 ‘선’을 지키는 최 감독에게 “즉석에서 컨펌을 받아” 허락(?)을 맡고 애드리브에 임했다고 말했다.
“이런 성격의 영화는 애드리브를 많이 낼 수밖에 없어요. 다행인 건 최성현 감독님이 직접 글을 쓰셨기 때문에 애드리브에 관해서도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게 자유로웠어요. 즉석에서 컨펌을 받고 ‘이건 안 맞는다’고 바로 지적해주시고요.”
특히 이병헌은 애드리브를 언급, 박정민과의 호흡이 ‘찰떡’ 같았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즉석에서 주고받는 호흡인 만큼 상대방의 반응 또한 중요했기 때문이다.
“(박)정민이도 애드리브를 참 잘해요. 서로 아이디어를 내면서 많이 웃었던 것 같아요. 정민이가 낸 아이디어 중에 가장 많이 웃었던 건, 놀이터 신이었어요. 막 약 올리고 ‘야, 3분 지났냐? 지났지?’라는 대사를 제가 하면 정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원래 대사였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3분 11초’라고 정확하게 답변하는데 순간 너무 재밌더라고요. 아주 적절했다고 봐요. 정민이도 세련되고 영리한 배우라는 생각이 드는데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해요. 인상 찌푸려지는 코미디나 애드리브들이 간혹 있잖아요? 그런데 정민이는 딱 그 지점을 피해가요. 되게 좋은 센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극 중 조하와 진태는 닮은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극과 극’ 캐릭터다. 특히 서번트증후군을 가진 진태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이에 “톤을 맞추는 것이 어렵지 않았냐”고 묻자, 이병헌은 “나랑 같지 않아서 재밌었다”고 답했다.
“처음 정민이를 만났을 때, 그렇게 얘기했어요. ‘네가 진태 역을 더 많이 연구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진태는 우리와 다른 옥타브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톤의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고요. 뭐, 알아서 잘 하더라고요. 하하하. 처음엔 그런 호흡을 맞추는 게 어색했어요. 처음이었으니까요. 저 혼자 연기하는 것 같고 상대가 안 받아주는 것 같았는데, 어찌 보면 그게 사실이잖아요? 극 중 조하도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그런 불협화음이 영화에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관객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다가 서서히 진태에게 익숙함을 느꼈고 편안해졌던 것 같아요.”
이병헌은 극 중 엄마로 등장한 윤여정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칭찬을 쏟아냈다. “순간 몰입이 대단한 분”이라며, “타성에 젖지 않는 배우”라고 추켜세웠다.
“오래된 배우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 ‘타성에 젖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 삶이고 일상이기 때문이죠. 윤여정 선생님은 그 정도 경력을 가지고 계시면 타성에 젖어 멈춰버릴 수 있는데 끊임없이 노력하시고 몰입하세요. 여전히 많은 매체에서 (윤여정을) 찾는 건, 선생님 안에서 끓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여전히 느껴져요. 그런 열정이요.”
이는 이병헌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한 고민”에 관해 묻자 그는 “배우라면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제가 어렸을 때,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찍을 때였어요. 선생님들을 보면서 ‘얼마나 좋을까? 정말 부럽다’고 했어요. 물 흘러가듯 연기를 하는데, 고민 없이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그때 하루하루가 괴로웠거든요. 당시에 PD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고요. 차라리 맞는 게 나을 정도로 심하게 먹었거든요. 하하하. 그때는 그랬어요. 그래서 대선배들이 정말 부러웠는데 제가 그 나이가 되니 ‘쉬운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민의 종류가 다르고 깊이가 다를 수 있으나 고민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아요.”
어느덧 데뷔 27년 차인 베테랑 배우지만 끊임없이 고민과 성장을 거듭하는 이병헌. 그에게 2018년을 맞은 관객들에게 새해 인사를 부탁했다.
“2018년을 맞았으니까 유쾌하고 따듯한 영화로 새해를 시작하셨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그런 의미에서 ‘그것만이 내 세상’을 보셨으면 좋겠고요.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에요. 모두 건강하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