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은 '삼국지'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촉한의 유비가 자기보다 20세나 나이 어린 와룡(臥龍)선생 제갈량을 삼고초려의 예로써 맞아들이면서부터 감동과 묘미가 더해지는 '삼국지'는 그의 계책으로 적벽에서 조조의 80만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제갈량이 충정에 넘치는 출사표를 두 번씩이나 올리며 출전한 오장원의 진중에서 일생을 마치는 장면과 함께 '삼국지'는 갑자기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탄력을 잃는다.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를 몇 번이나 읽었다 하더라도 사실 끝까지 읽은 사람은 드물다 한다. 제갈량이 '삼국지'에서 사라져 버리는 오장원 대목에서 더 이상 책을 읽어나갈 기력과 흥미가 급전직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중·일 세 나라 학생들에게 동북아 3국의 역사적 위인 중에 제일 좋아하는 인물을 들어보라는 한 설문조사에서 제갈량이 제1위에 꼽혔다, 또한 2009년 5월 2일, 홍콩청년협회가 5·4운동 90주년을 맞아 실시한 전화 면접조사 결과 제일 존경하는 고대인물에 제갈량이 공자를 누르고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제갈량은 어째서 중국 역사상 제일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는가? 신출귀몰한 그의 정치·군사 전략 말고도 주군에게 대를 이어 끝까지 충성을 다한 최고위 책사(策士)로서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었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웠기 때문이다.
중국 지식인의 로망은 책사다. 그들은 자신이 언젠가 나라를 바꾸어놓을 수 있는 웅대한 꿈을 먹고 산다. 주군을 보위하는 책사의 능력치에 따라 세상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역사를 목도해왔기 때문이다. 책사는 정책을 기획하는 정치핵심으로 때로는 주군의 지혜주머니에 그치지 않고 정국을 사실상 주도하는 핵심 실세 역할을 했다.
강태공, 관중, 장량, 제갈량 등 최고위 책사들은 각각 주문왕, 제환공, 유방, 유비 등 주군의 스승 제왕의 스승 제사(帝師)로서 세세대대로 숭앙을 받아 왔다.
비단 정사뿐만 아니다. 야사에서도 그렇다. 역사3, 허구7의 '수호전'의 1인자 송강(宋江)의 오른편에는 항상 양산박의 제갈량, 서열 3위 오용(吳用)이 자리하여 송강의 최고 책사로서 극진한 예우를 받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 시진핑의 책사···왕후닝은 누구?
이러한 책사 우대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국내외 행사시 오른편에는 대개 '21세기 제갈량', 왕후닝(王扈寧, 1955년생)이 자리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해외 출국시 항상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와 제사 왕후닝을 대동한다.
왕후닝(당서열 5위)의 이미지는 ‘고요’와 ‘신비’로서 중국 정계의 이단아다. 당서기나 성장, 정부고위직 경력이 하나 없는 대학교수 출신이 지고지상의 '중국정치 7룡(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고, 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 3대째 중국의 통치이론을 제시한 제사라서 그렇다.
또 그는 세 번이나 결혼한 이른바 ‘뇌색남’이다. 첫째 부인은 그의 3세 연상의 캠퍼스 커플, 둘째 부인은 12세 연하 띠동갑인 그의 제자, 현재 부인은 그와 30세 연하로 전해지나 그 외는 ‘고요’와 ‘신비’다.
1955년 10월 상하이에서 출생한 왕후닝의 원적지는 제갈량의 고향 산둥성 린이(臨沂)와 동북쪽으로 200㎞ 떨어진 라이저우(萊州)다. 왕후닝은 어렸을 때부터 병약한 편이었으나 ‘책벌레’로 유명했다.
그가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문화대혁명이 발발했다. 길거리에 나가 광란의 혁명무도회를 벌인 홍위병과 달리 그는 방에 틀어 박혀 책만 읽었다. 1971년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신체가 너무 허약해 벽촌으로 노동을 보내는 하방(下放)을 면했다. 그 무렵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다독(多讀)·다사(多思)·다작(多作)의 좋은 습관을 길렀다.
1974년 상하이 사범대학(현 화동사범대)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졸업후 상하이시 출판국에 배치되었다. 문혁이 종료되고 덩샤오핑이 '3전3기'에 성공한 해인 1978년 왕후닝은 상하이 최고 명문대학이자 중국 5대 명문대학의 하나인 푸단(復旦)대학교 국제정치과 석사과정에 진학, <자본론>의 대가 천치런(陳其人)의 문하생이 됐다.
1981년 법학석사학위 취득후 대학에 남아 국제정치학과 조교와 강사 부교수를 거쳐 1989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푸단대 정교수로 임용됐다. 미국 아이오와대, 캘리포니아대 방문학자를 지내는 등 정치학자로서 경력을 다졌다. 1980년대 이미 왕후닝은 저명한 청년학자가 되어 '반웨탄(半月談)'등 시사 잡지의 표지인물이 되기도 했다. 1987년 중국공산당 제13차 대회의 중요이론문헌의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왕후닝이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1993년 그가 푸단대 토론팀을 이끌고 싱가폴의 '국제중국어 대학생 토론대회'에 참가했을 때다. 당시 중국 TV는 토론대회의 전과정을 현장 실시간 중계했다. 결승전에서 왕후닝 감독의 푸단대 팀이 타이완대학 팀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 순간 왕후닝은 중국 신세대의 스타로 떠올랐다. 직후 출판된 '싱가폴 설전 계시록(獅城舌戰啓示錄)'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17년 10월 25일 11시 57분(베이징 시간)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대청 무대 위, 왕후닝은 시진핑에 이어 다섯 번째로 걸어 나왔다. 굵은 안경테 안으로 예리하게 빛나는 큰 눈망울, 전형적인 서생(書生)의 모습의 그가 중국정치7룡에 등극한 것은 중국 공산당 19차 당대회 최대의 이변이였다.
세계 각계는 발칵 뒤집혀 졌다. 중국 각계에서 가장 빨리 가장 뚜렷하게 반응한 곳은 도서시장이었다. 순식간에 중화권 전역의 온·오프라인 서점은 난리가 났다. 왕후닝이 푸단대 법과대학 학장시절 쓴 책 '정치적 인생(1995년 1월 출간, 정가 8.7위안)'의 온라인 비공식거래가 620위안까지 치솟았다. 당일 오후 1시도 안되어 책은 완전히 품절됐다.
도대체 '정치적 인생'은 무슨 책이고 어떤 가치가 있는가? 시진핑의 브레인, 왕후닝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진귀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1995년 가을, 학계에 도사리고 누워있던 와룡(臥龍) 왕후닝이 중앙무대로 승천하기 직전에 쓴 일기를 묶어 편집한 책이다.
'정치적 인생'은 왕후닝이 편안한 마음으로 비교적 평이하고도 솔직하게 쓴 독서서평과 일상의 신변잡기다. 그가 '킨제이 보고서', '자유로부터의 도피', '이코노미'등 드넓은 스펙트럼의 광폭독서를 좋아하며 영화 감상과 자작시를 전서체로 쓰길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이하는 필자가 스크랩한 '정치적 인생'의 주요 대목이다.
"현대세계를 사는 모든 현대 중국인에게 정치적이 아닌 것은 없다.
나도 모르게 든 습관은 깊은 밤에 일어나 낮에 겪은 일을 반추하는 것이다.
나는 낮 시간을 지독하게 엄숙하고 건조한 학술적 사유로 보낸다.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어두운 밤의 장막이 내리고 일체가 고요해질 때, 창밖의 섬광을 보며 자신과 세계를 사유한다. 참된 사유의 침전과 누적은 고요한 외부와 고요한 내심에서 형성된다. 고요함의 끝 간 데!
이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경계다." -'정치적 인생' 서문 발췌
"국가사회의 흥망성쇠는 왕왕 인간이 받는 여러 종류의 유혹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근대 이후 최대의 유혹은 ‘민주정치’의 유혹이다. 사회발전과정에 정치민주화가 우선이라는 조급한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은 국가사회의 안정적 발전의 필수 조건이다."
"중국사회는 붕괴될 것인가? 4개 시스템만 주의하면 된다. 군대, 정당, 당정간부와 지식인, 이 4개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서양 물질문명 속의 가치체계는 중국이 그대로 따라가야 할 것이 아닌, 참조할 만한 가치 체계 일뿐이다. 오늘 중국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유구한 중국의 역사 문화 전통 중에서 새로운 정치가치의 발굴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 생활하는 자는 어떤 사람은 강자로서, 또 어떤 사람은 약자로서 살아간다. 어떤 다른사람이 설정한 목표로 살고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목표를 설정해 준다. 어떤 사람은 감성적, 어떤 이는 의지로 생활한다. 나는 대개 이 한쌍의 개념중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누가 정치인인가? 죽음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신념, 동서양을 넘나드는 학문, 마음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성, 멀리 높이 바라보는 혜안, 백절불굴의 의지, 모든 시냇물을 품는 바다와 같은 도량, 대세를 통찰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정치적 인생' 본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