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전투경찰은 국군의 통제 하에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불리한 조건에서 작전을 실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서전사의 창설로 그런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이제까지 남원에 주둔하며 경찰을 통제하고 군과의 협조임무를 수행했던 치안국의 서남지구전방지휘소는 해체되고, 그 요원들은 모두 서전사로 통합됐다.
새로 발족된 서전사는 6천여 명의 자체 병력을 포함하여 서전사가 관할하게 될 1개 시(市), 12개 군의 경찰병력 1만 2천명(의경 및 향방대원 포함)을 합한 1만 8천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남지구의 빨치산들은 모두 약 1천 명 정도로 추산됐다. 서전사의 발족에 즈음하여 이들 빨치산들도 기민하게 대처했다.
이현상의 제5지구당에서는 전투경찰대의 강력한 토벌작전에 대비하여 1953년 4월 30일 지구당 조직위원과 전라남북도당 및 경남도당 위원장을 지리산으로 긴급 소집하여 조직위원회를 개최했다. 조직위원은 이현상(李鉉相)을 비롯한 각 도당(道黨)의 위원장들이었다. 이 회의 결과 제5지구당 결정서 8호로 각 도당, 군당, 면당 유격대 별로 분산되어 있던 빨치산들을 규합하여 군 편제로 개편했다. 이에 따라 김지회부대는 제5지구당 직속으로 배치됐고, 전남도당 산하의 빨치산들은 전남부대, 전북도당의 빨치산들은 전북부대, 경남도당의 빨치산들은 경남부대로 통합됐다.
차일혁은 제2연대장의 보직을 받고 이현상과의 마지막 결전을 각오했다. 그리하여 평소 아끼던 부하들을 2연대로 발령을 내게 했다. 김용식, 양희근, 이기봉, 최순경 등 빨치산 토벌에서 남다른 전투력을 발휘한 이들을 모두 데려왔다. 험준한 산악과 골짜기를 누비며 빨치산들을 토벌했던 그들이라, 이제는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눈치만 보고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는 부하들이었다.
차일혁이 이현상과의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 있던 1953년 7월 14일 서전사 사령관이 교체됐다. 이하영 사령관의 후임으로 저돌적인 성격의 김종원 경무관이 새로 부임했다. 거창양민학살 사건으로 군에서 경찰로 옮겨온 그는 전북도경국장을 시작으로 경찰에 입문했던 자이다. 김종원은 차일혁이 무주경찰서장일 때 도경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종원은 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령부 요원들을 일선 연대로 배치했다. 이른바 사령부 요원들을 줄여 일선부대의 전투력을 보강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연대의 본부들을 빨치산이 있는 지점으로부터 1,000미터 이내에 둘 것을 지시했다. 김종원 방식의 현장을 중시한 조치였다.
1953년 8월 3일 서전사 작전명령 제6호가 하달됐다. 이 작전은 화동의 화개장을 포위하여 집중 공격한다는 의미에서 ‘화개장작전’으로 명명했다. 화개장은 1951년 남부군단이 지리산에 전력을 가다듬은 곳으로, 빨치산들이 근처의 칠불암(현재 하동 칠불사)에 거점을 두고 화개지서를 여러 번 습격하는 등 마지막 저항을 했던 곳이었다. 제2연대는 서전사의 주공(主攻)부대로 선정되어, 경남 하동의 화개장 지구로 연대본부를 옮겨 빨치산들의 거점을 공격하게 됐다. 하동 화개장은 경남과 전남을 잇는 도(道) 경계에 있어 하동, 구례, 광양과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지리산과 백운산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으로, 지리산 공비토벌에 있어서 가히 거점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차일혁은 화개장작전에 따라 제1대대를 경남 하동군 용강면까지 진출시켰다. 그리고 제1대대장에게 본 작전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선을 넘지 말도록 지시했다. 제2대대는 남원경찰서 부대와 함께 동행하도록 명령했다. 이 무렵 이용문(李龍文) 소장이 지휘하는 남부경비사령부(이하 남경사로 통칭) 소속의 제56연대와 제11경비대대는 지리산과 백운산지구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서전사의 제1,3,5연대와 제2연대 제2대대는 저지부대로 제2연대를 지원하게 됐고, 구례· 남원·함양 경찰서 부대들은 화개장 주변에서 2중의 포위망을 형성하도록 했다. 이때 반공포로석방 때 석방된 포로들로 구성된 618부대가 제2연대에 배속됐다. 618부대는 반공포로 석방일인 6월 18일을 따서 붙인 부대로 약 2백명의 대원들로 이루어진 특수부대였다. 618부대의 대장은 인민군 중좌출신의 강우집이었고, 부관은 김명주(본명 김창순)였다. 대원들은 모두가 스무 살 안팎의 어린 나이였다.
며칠 후 618부대 내에 항명사건이 발생했다. 대원들 모두가 강우집의 지휘에 불만을 품고 대장을 김명주로 바꿔달라는 것이었다. 강우집은 술주정이 심했고, 대원들을 자신이 인민군 연대장시절 부하들처럼 함부로 다루는 과정에서 결국 대원들의 반발을 사게 됐다.
차일혁은 부대의 특성상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의견대로 사령부에 건의하여 김명주를 618부대의 대장으로 임명했다. 김명주는 곧 부대를 정비하고 대원들을 훈련시켜 618부대를 서전사 내에서 가장 강한 부대로 만들어갔다.
서전사의 창설 이후 다시 차일혁 부대의 취재를 맡은 김만석(金萬錫) 기자는 김명주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 후 차일혁에게 “김 군이야말로 이 땅에 둘도 없는 수재임에 틀림이 없소. 그런 아까운 인재가 총을 잡고 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 같은 지방신문 기자보다 한 차원 높은 합동통신 전주지사장 자리에 그를 추천하고 싶은데 대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차일혁도 “물론이오. 그와 같은 인재가 이곳에서 썩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소. 김 기자가 잘 알아보고 좋은 자리가 있으면 김 선생을 이곳에서 하루 빨리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김 기자는 “연대장님은 참으로 인복(人福)이 많은 사람입니다.”라며 부러워했다.
차일혁은 김명주가 전투경찰보다는 학자가 더 어울릴 것 같아 618부대를 그만두고 신문기자나 아니면 다른 것을 해보라고 권유했었지만, 그는 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618부대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618부대는 부대장 김명주와 작전참모 최재범의 지휘통솔로 단결된 가운데 절대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고, 어떤 부대에도 지지 않는 강한 부대로 성장했다. 거칠기로 유명한 귀순 공비들로 구성된 보아라부대도 618부대를 당해내지 못했다.
한 번은 보아라부대가 먼저 618부대에게 시비를 걸어온 적이 있었다. 서전사의 병력 중에서도 무기가 가장 열악했던 618부대가 부대기를 앞세우고 군가를 부르며 남원의 서전사 사령부에 들어가 무기 교환을 하는데, 마침 사령부에 들어와 있던 보아라부대와 부딪쳤다. 신상묵 경무관이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관 시절, 귀순 공비들로 구성됐던 보아라부대는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빨치산토벌에서 많은 성과를 거뒀고, 이에 따라 그들에 대한 상급부대의 신임과 지원이 대단했기 때문에 다른 전투경찰부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618부대는 반공포로출신이고, 문순묵의 보아라부대는 귀순 공비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서로 미묘한 경쟁심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618부대는 배속되자마자 용맹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보아라부대는 내심 질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먼저 보아라부대가 시비를 걸어와서 두 부대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으나 보아라 부대원들이 618부대에 얻어맞았다. 시비를 걸었던 보아라부대는 618부대원들이 거칠게 나오자 기가 죽어버렸다. 이 일은 사령관의 귀에까지 들어가 심한 질책을 받았으나, 이후부터 어느 부대도 618부대를 함부로 얕잡아보지 못했다. 이로써 618부대는 서전사에서 가장 강한 부대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지리산만은 여전히 총성이 멎지 않고 있는 전쟁터였다. 지리산의 평정 없이는 남한의 평화가 없고, 이현상의 생포 없이는 지리산의 평정이 불가능하다는 이승만 박사의 특별 담화가 있었고, 이현상을 직접 만날 용의가 있다는 담화도 있었지만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사고가 터졌다. 그때가 1953년 8월 12일이었다. 제1대대장 김동진이 빨치산의 습격을 받고 행방불명이 됐다는 것이었다. 본부 수색대장 김용식을 시켜 1대대가 주둔한 경남 하동 용강면으로 가서 제1대대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며칠 전에 얼굴을 보았고, 아침에도 전화로 상황보고를 받았기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제1대대장은 전남 전투경찰대 대장시절 백아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지휘관으로, 빨치산 토벌에서 항상 선봉을 섰다.
둥근 얼굴에 단단한 체력을 가진 그는 성격이 괄괄하고 거침이 없어, 제18전투경찰대대시절 부하였던 우희갑 경감을 생각나게 했다. 다음날 떠나라고 해도 듣지 않고 저녁에 출동했다가 공비들의 기습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한 우 경감처럼, 수차례에 걸쳐 그에게도 작전에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하며 아끼던 부하였다. 그의 불같은 성격이 지리산 빨치산토벌작전에서 최선봉에 적합할 것 같아 주공 부대의 맨 선두에 배치하긴 했으나, 차일혁은 내심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었다.
차일혁은 하동 용강면에 제1대대를 주둔시키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인근 쌍계사에 주둔하고 있던 618부대가 용강에 진출할 때까지 예정선을 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러나 용강에 진입한 제1대대장은 이미 그곳을 떠나 삼장 가까이 진출해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 지역에는 남부경비사령부 예하의 국군 제56연대와 제11경비대대가 작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경사 소속의 부대는 제2연대 제1대대가 이곳으로 오기 전, 이미 빨치산들의 기습을 받아 소령을 비롯해 몇 명의 장교 및 사병들이 이미 피해를 입고 있었다. 국군을 기습해 타격을 가한 빨치산들은 군복을 빼앗아 입고 도주해 버렸다. 뒤늦게 같은 지역에 진출한 경찰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서전사가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경찰은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펴고 있는 국군에 대해,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군인만 만나면 주눅이 들어 제대로 작전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빨치산들은 이점을 이용하여 김동진 제1대대장과 대대참모들을 유인해 사살한 것이다.
국군 복장으로 변장한 빨치산들은 정찰 나온 제1대대 대원들을 불러, 함부로 국군의 작전 지역에 침입했다며 호통을 치고는 경찰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순식간에 무장을 해제당한 경찰들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후 빨치산들은 대담하게도 경찰대원 한 명을 시켜 대대장을 데려오게 했다. 다혈질인 제1대대장은 부하들이 국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수모를 겪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전후 사정을 가리지 않고 5명의 부하만 데리고 부하들이 무장해제를 당한 곳으로 달려갔다.
빨치산들은 김동진 제1대대장과 5명의 경찰이 달려오자, 갑자기 총으로 위협하여 앞장세운 뒤 경찰들을 무장 해제시켜 빼앗은 무기를 가지고 산으로 달아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1대대 척후대원들은 대대장이 끌려가는 것을 멍청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려 뒤를 쫓았지만 허사였다. 제1대대 대원들은 대부분이 나이 많은 철도경찰출신과 훈련과 실전경험이 부족한 대원들이 대다수라 빨치산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서전사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경찰이 군의 통제 하에 빨치산 토벌을 했기 때문에 군경 간에 정보교환이 원활하여 빨치산들에게 쉽게 속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이 군과 별도로 독자적인 작전을 하면서 군과의 정보교환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고, 나아가 서로 간에 경쟁심리가 발동하면서 상호 협조가 잘 되지 않아 그런 결과를 빚게 됐던 것이다.
빼앗긴 무기는 고사하고 끌려간 대원들의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차일혁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수많은 어려운 전투를 치렀지만 이처럼 당황스럽기는 처음이었다. 김동진 대대장이 빨치산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던 제1대대 의 척후대원들에게 추격하게 할 수도 없었다. 차일혁은 먼저 618부대를 출동시켰다. 그리고 임실에서 데려온 연대 수색대를 투입하여 추격전을 전개했다.
빨치산들은 형제봉 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618부대와 연대 수색대는 맹렬히 추격하여 형제봉 부근에서 그들과 교전했다. 618부대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공격해 들어가 빨치산들에게 빼앗겼던 무기를 되찾고, 김동진 제1대대장과 5명의 시신을 찾아왔다. 시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난자당한 채로 버려져 있었다. 618부대의 과감한 공격에 기세가 꺾인 빨치산들은 빼앗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빨치산들을 추격하는데 큰 공을 세운 618부대에게 소 2마리를 사서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며 포상했다. 함께 수색을 나갔던 제2연대 수색대는 빨치산 1명을 생포해 왔다. 그는 여러 곳에 총상을 입고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기진맥진해 물을 찾으며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대원들은 증오심으로 어느 누구하나 선뜻 물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차일혁이 포로에게 물을 갖다 주며,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그는 냉소를 띤 표정으로 “묻지 말고 어서 죽여 달라!”고 했다. 차일혁이 다시 “누구의 짓인지 어서 말을 해.”라고 소리를 지르자, 그때서야 “이영회 지도부장 소속이다.”라고 말했다. 이영회라면 바로 2년 전 무주 구천동 작전 때 차일혁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자였다.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 난 차일혁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김동진 대대장의 옷을 손수 갈아 입혔다. 연대본부에서 열린 그의 영결식에 참석했던 부인의 애절한 통곡 소리는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 이영회부대는 포로를 관대히 대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제1대대장 피습사건을 보고, 차일혁은 빨치산들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초기에 이현상 예하의 빨치산 지휘관들이 보여줬던 포로들에 대한 관대한 처리방식은 그들 나름대로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군경의 토벌에 시달려온 빨치산들에게 더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차일혁은 비록 사랑하는 부하들을 잃었지만, 대신 빨치산들의 허약한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이로써 차일혁은 이현상의 본격적인 결전을 앞두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