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억의 밤’을 연출한 장항준 감독은 배우 김무열(35)을 두고 이렇게 소개했다. 야누스적 매력을 가진 김무열은 납치된 후 기억을 잃고 변해버린 형(김무열 분)과 그런 형의 흔적을 쫓다 자신의 기억조차 의심하게 되는 동생(강하늘 분)의 엇갈린 기억 속 살인사건의 진실을 담은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를 그린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였다. 선과 악, 양극단을 넘나드는 연기는 김무열의 장기이자 무기기 때문이다.
뮤지컬 ‘쓰릴미’,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비롯해 드라마 ‘일지매’, 영화 ‘작전’, ‘은교’, ‘대립군’에 이르기까지 선과 악, 수없이 많은 얼굴을 연기한 그는 이번 작품에서 납치당한 후 기억을 잃고 낯설게 변해가는 형 유석을 연기했다. 그는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로 극의 긴장감을 배가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가 가진 외형적 장점은 잘생기지도, 개성 있지도 않은 일반적인 얼굴이라는 거예요. 어떤 역할이든 대입할 수 있죠. 감독님은 이를 양면성이라고 칭찬해주셨는데 유석이 가진 감정을 토대로 극적 설정 안에서 마음껏 연기할 수 있었어요. 오히려 편했죠. 진석의 관점에서, 유석의 관점에서 연기하고자 했어요.”
유석의 캐릭터를 설명할 때 스포일러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 캐릭터 자체가 사건의 핵심이기 때문. 김무열은 다양한 감정과 복잡한 심리 상태를 가진 유석을 어떻게 접근하려고 했을까?
“매번 캐릭터를 다가갈 때 치열하게 하려고 노력해요. 늘 ‘얼마나’ 그랬을지 가늠해보죠. 제 안에서 더 극적으로, 극단적으로 만들어가려고 해요. 유석의 경우는 기본적 트라우마를 염두 했죠. 진석의 것보다는 더 클 것으로 생각했어요. 정신의학적으로도 접근했고 그런 부분을 열심히 공부했어요.”
드라마적 요소가 강한 작품을 선호했던 김무열은 앞서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더라도 그렇다. 인물 간의 드라마가 복잡하게 얽힌 작품을 선호했던 김무열은 이번 작품으로 스릴러 작품에 발을 딛게 됐다.
“‘기억의 밤’은 달랐어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낯설어지고 의심으로 바뀌면서 공포로까지 번졌다가 스스로를 불신하게 되는 지점이 마음에 무척 들더라고요. 이해가 쉽고 흡입력이 있었어요. 궁금증도 자극했고요. 그런 부분이 참 재밌게 느껴졌죠. 거기다 감정적인 힘이 작품 전체를 가져갈 정도로 크고 거대해서 배우로서도 연기해보고 싶은 욕구가 강했어요.”
스릴러 장르에 크게 한 발을 딛게 된 김무열에게 장항준 감독은 매우 중요한 나침반이었을 터. 그간 장 감독이 선보인 작품의 결과 크게 다른 ‘기억의 밤’에 대한 의심이나 우려는 없었는지 궁금했다.
“걱정은 있었죠. 하지만 영화의 만듦새에 관해 의심하지는 않았어요. 감독님이 9년 만에 내놓은 작품인 만큼 마음가짐이 단단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자세가 되어있어서 ‘작정하고 나오셨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인의 욕심이 아닌 배우, 스태프가 다 함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의견이나 생각에도 귀 기울여주셨고 영화를 함께 발전시킨다는 느낌을 받았죠. 초반의 걱정은 감독님을 만나며 많이 상쇄됐어요.”
‘기억의 밤’은 그야말로 장 감독과 스태프, 배우들이 함께 만들어간 작품이었다. “어떤 작품보다 애착이 큰” 이유도 바로 이 점이었다.
“중간에 유석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이 보다 더 자세했었어요. 감독님께 유석을 설명하는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해달라고 부탁드렸고 약간 반영되었어요. 스피드한 전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또 진석이 먹는 약의 성분도 당위성을 위해 ‘최면을 유지할 수 있는 성분’으로 설정해달라고 했어요. 원래는 약도 맥거핀(macguffin, 속임수)이었거든요. 이런 식으로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의 아이디어가 반영됐고 감독님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해주셨어요.“
영화는 진석과 유석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또한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으로 특별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만큼 김무열과 강하늘의 연기 호흡 또한 중요했을 터.
“하늘이와의 연기 호흡은 정말 좋았어요. 둘 다 서로를 배려하는 타입인 데다가 눈치가 빨랐거든요. 촬영해야 할 분량을 심층적으로 합의할 필요 없이 충분히 맞춰볼 수 있었어요.”
강하늘의 데뷔작인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함께 했던 김무열인 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남달라 보였다. 친형제처럼 격 없고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과 장항준 감독은 동료보다는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늘이가 입대하게 돼 장 감독님과 저, 단둘이 영화 홍보를 하게 됐어요. 감독님은 하늘이를 원망하기 시작하셨죠. 하하하. 혼자 홍보를 다 해야 해서 힘드신 것 같아요. 보시다시피 영화 촬영 현장은 정말 즐거웠어요. 저와 하늘이가 편을 먹고 감독님을 놀리는 식이었죠. 작품은 무겁고 진중했지만, 현장만큼은 즐겁고 유쾌했던 것 같아요.”
약 한 시간가량의 대화를 통해 영화 ‘기억의 밤’에 대한 김무열의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매 장면에 온 신경을 기울인 김무열은 예비 관객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접근하기 쉬운 스릴러이니 꼭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단순하게 놀이기구를 탔다고 생각하고 몸을 맡기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저희가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해드리겠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