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한 사귐, 망형지교(忘形之交)
벗과의 사귐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해서 유형화시키기 힘들다. 벗을 두고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 했던 인디언들, 관포지교(管鮑之交)니 지음(知音)이니 하는 동양의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다. 우정을 표현하는 말들은 각기 결을 달리하지만 우리는 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쉽게 짐작하게 된다. 즉, 사람들은 “나를 알아주는 존재”를 찾아 끝없이 떠돌며 그 과정에서 마음으로 얻은 이를 비로소 ‘벗’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벗이란 술잔을 건네며 두터운 정을 나누거나 손을 꽉 잡고 무릎을 가까이 한 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벗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으나 저도 모르게 말하게 되는 벗이 있다.” 그는 가감 없이 ‘우정’의 층위를 짚어내었다. 끝없는 대화 속에서도 허무함이 느껴지는가 하면 침묵 속에서도 소통하는 경우가 있다. 나이·성별·지위·경제적 능력 등을 다 걷어낸, 이른바 ‘망형(忘形)’의 상태에서 우정의 참 모습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들을 망형지교로 이끄는 출발점은 어디에 있을까? 나쓰메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늘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디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두드려볼 줄 안다면 좋은 관계가 아닐까. 지척의 거리나 시간의 누적, 계층의 동질성이 이를 해결할 수는 없기에 생각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손 안의 기기에서 관계가 창출되고, 쉽게 얻어진 그것을 ‘인연’ 혹은 ‘우정’이라 생각하는 현재로서는 더 어렵다.
필자는 젊은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가 많다.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성세대와는 또 다른 사회적 불안요소들이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기에 늘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혹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라지만, ‘아프지 않은 청춘’이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관계 속에서 위로받는다면 덜 아플 수도 있다. 그러니 이들이 잠시 기기 밖으로 걸어나와 ‘망형’의 사귐으로 서로를 숙시(熟視)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