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이 정도 되면 갈 때까지 간 것이다. 남녀 간의 애정이나 친구 간의 우정에도 기울기가 지나치게 흐트러지면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다. 상대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무너지면 균형을 회복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사드 배치에 대한 한국 내 찬성 여론이 80%에 달하고 있고, 전술핵 재배치에 대한 긍정적 여론도 70%에 근접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전술핵까지 배치한다고 하면 중국이 우리와 단교를 선언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북한의 핵무장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마당에 한국과 일본의 전술핵 배치는 이미 타임 테이블에 올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상황이 급반전되고 있는 마당에 우리가 중국에 연연하면 할수록 우리 처지만 곤란하게 된다. 출구(出口) 전략을 신속하게 만들어 최소한 국내 여론만은 결집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의 경제 관계도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기업들도 이에 준하는 시나리오 플래닝으로 대응해 나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대담해질수록 가질 수 있는 선택적 대안도 더 많아진다.
상당수 우리 기업들이 사드 보복 영향으로 인해 시쳇말로 죽을 지경이다. 대기업은 물론이고 베일에 가려져 고통을 호소하는 중소기업들도 허다하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시장 경영의 실패를 사드 탓으로만 돌리는 것에는 선뜻 찬성하기 어렵다. 중국 시장의 변화와 경쟁 구조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대응해 온 우리 기업에도 응분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 사드가 단지 이들의 실패를 더 크게, 빠르게 부추겼을 뿐이다. 현대차의 경우는 현지 시장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로컬 완성차 브랜드의 추격을 등한시 했다. 롯데마트의 경우는 진출 초기 단계의 입지 선정에서부터 상품 소싱과 관리 등 마트 경영에 실패한 것이 더 큰 원인이다. 아모레퍼시픽의 고전도 이미 예견된 참사 중의 하나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쉬쉬하면서 ‘화장품 굴기’를 은밀하게 추진해 왔다. 상당 수 우리 업체들이 중국에 보금자리를 텄지만 이제는 동남아 등으로 리로케이션을 해야 할 지경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편 사드 보복을 계속해 나가는 중국의 속내도 그리 편하지 않다. 특정 한국 기업에 대한 피해가 커지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중국 기업 혹은 노동자에 대한 피해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 지금부터는 ‘낯선 중국’과의 진검 승부를 준비해야 한다
1990년대 초·중반 말레이시아 주재 시 경험한 일이다. 성수대교, 상품백화점 등이 연달아 붕괴되면서 당시 세계 최고층 빌딩 ‘페트로나스 트윈타워’의 빌딩의 한 쪽을 짓고 있는 한국 건설업체에 공사를 맡껴서 큰 일이라는 기사가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다. 당시 마하티르 정부의 슬기로운 대처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 이후 말레이시아의 ‘Look East'라는 정책의 벤치마킹 모델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지금의 중국은 더 이상 한국에 대해 아쉬운 것이 많지 않다. 우리가 중국에 아쉬운 것이 훨씬 더 많다. 한국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을 만큼 로컬 업체들이 충분히 성장하고 있다. 제조업 대국에서 강국으로 치닫고 있는 마당에 한국 기업에 중국에 진출하거나 진출한 기업들이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일반 상품의 경우도 구태여 한국산이 아니더라도 일본산, 유럽산 등 대체상품이 수두룩하다. 극히 일부 영역만을 제외하고는 한국을 거의 다 따라 잡았다는 자신감에서 사드 보복이 더 노골적이면서 장기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안달하면 할수록 그들의 보복 효과가 커질 수밖에 없는 구도이다.
이럴수록 중국보다 더 냉정해져야 한다. ‘낯선 중국’을 인정하고 정부나 기업이 중국 시장 진출에 대한 ‘새 판’을 짜야 한다. 그러면서 중국에 대한 할 말은 해야 한다. 무분별하거나 무책임한 합작계약 파기 혹은 원점 재검토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성토해야 한다. 불공정한 무역 행위에 대해서 WTO 제소를 해야 한다. 한편으론 정치와 경제가 별개라는 측면에서 우리 재계의 마당발 대응도 필요하다. 중·일간의 댜오위다오 분쟁 사태 이후 우리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일본의 경단련(經團聯)이 양국 민간 레벨의 교류 확대를 위한 노력이 돋보이기도 했다. 전경련의 그런 기능이나 능력이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상이다. 다소나마 고무적인 것은 북핵 위협이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치달으면서 중국 내의 식자층이나 정치 원로들 중에 한국과의 지나친 갈등 격화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일부 중국 기업들 중에는 사드 사태가 한·중 비즈니스의 교통정리와 구조조정 차원에서 새로운 전기(轉機)로 만들어가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우후지실(雨後地實: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이라고 냉정하고 차분해질수록 의외로 먹구름이 빨리 걷히고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는 법이다. 더 이상 없는‘낯익은 중국’대신 ‘낯선 중국’과의 한판 승부를 착실하게 준비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