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접점은 어둠이다. 너머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深淵)이다. 빈 공간의 무(無)이자 불안, 동경(憧憬)이다. 수많은 침묵의 언어가 유영을 한다. 추상으로 촘촘히 짜여진 날개를 달고. 침묵은 상징(象徵)의 이미지로 태어난다. 촛불의 상상(想像)성이다.
수도원 빈방에서,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서, 자식의 무사를 비는 늙은 어미의 정한수에서, 습관적 유희의 생일 케이크에서, 그리고 광장 특히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은 오늘도 전설을 만든다. 촛불의 현실(現實)성이다.
촛불은 상상의 과정이자 매개체다. 촛불은 끊임없이 사유를 강요한다. 촛불 앞에서 우리는 유(有)에서 무(無)로, 유한(有限)에서 무한(無限)으로, 존재에서 비존재로, 물질에서 추상으로 은유를 겹겹이 쌓아간다. 촛불의 확장(擴張)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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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촛불 앞에서 간절하게 기원하고 소망한다. 권력자도, 재벌도, 현자도 한없이 작아지고 연약해진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진 것을 내려놓는다. 초월적 상징의 간절함이 이성(理性)과 합리를 앞선다. 어린 시절이후 이렇게 순수하고 간절한 적이 있었던가? 촛불의 순수(純粹)성이다.
촛불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고, 어느 순간 우리가 아닌 우리를 찾아준다. 자기연소를 하며 시간을 소멸시키는 모습은 아름답다. 숭고하기조차 하다. 촛농의 찌꺼기를 남기며 고체에서 기체로 승화는 과정은 우리를 피안으로 이어준다. 현실과 사유를 너머, 이성(理性)의 강을 건네주는 다리다. 인간이 촛불을 응시하는 이유이다. 촛불의 본질적 승화(昇華)성이다.
그렇기에 촛불의 공간은 비어 있다. 물질과 형상은 사라진다. 궁극적으로 그 빈 공간마저 사라진다. 여기에서 너와 나, 적과 아군, 적폐와 정의의 구분은 탈(脫)의미이다. 형상화된다 해도 그 확장성은 제한된다. 촛불은 어느새 이미지를 극복하고 몰(沒)존재론적 본질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를 빌리지 않더라도 촛불은 작은 숨결에도 흔들린다. 연약한 심지를 곧추세운 채 끝없는 투쟁을 하며 거기 그대로 있다. 자신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서다. 그러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언어를 만들고 우리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거기에는 어떤 명분과 가장된 정의보다는 직관이 명징하게 사유의 길을 닦게 해준다. 촛불이 우리를 광장으로 불러내는 힘이다.
프랑스대혁명이 그랬고, 4·19혁명이 그랬다. 1968년 반전을 슬로건으로 촛불의 집단화(이때 집단은 ‘시민’들로 구성됐다. ‘군중’은 결코 아니다)를 처음 시도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그랬다.
그곳에서 촛불은 첨탑이다. 하늘로 향한 수직성의 직선이다. 노란 속살은 정직을 담아 뾰족하게 불타오르며 하늘로 치솟는다. 인간에 대한 탐구와 욕망을 담은 강력한 의사표시다. 강한 바람에 마지막을 다하는 순간까지도 구부러졌던 수직성을 회복하는 데 안간힘이다. 인간이 사유로써 윤리, 정의, 도덕을 찾아가는 원천이다. 광장의 촛불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촛불이 갖고 있는 의미와는 달리 촛불에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붓지는 않는다. 촛불 앞에서 영혼을 끄집어내야 할 때도 결코 나신(裸身)으로 춤을 추지 않는다. 절제의 미덕이다. 횃불처럼 이글거리지 않는다. 주변을 불태울 것처럼 달려들지도 않는다. 촛불을 맞이한 인간의 숙명이다. 프로메테우스가 평생 짊어졌던 형벌의 구속이기도 하다. 광장의 촛불이 집단성 덕에 불멸(不滅)의 심지를 가진 것 같지만, 별볼일 없는 미립자의 엉성한 조합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광장의 촛불이 갖는 한계이다.
그렇기에 촛불은 쉽게 분노하고 출렁인다.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다. 삶과 죽음은 아주 적절하고도 완벽하게 대립을 이룬다. 사랑과 분노도 기가 막힌 짝으로 나타난다. 적어도 광장에서만큼은 그렇다.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당신은 평화를 원하는가? 당신은 사랑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작은 숨결에도 온몸을 떨어 전율하며 자신을 불태우는 작은 불꽃을 보라. 당신은 자비를 원하는가? 당신은 혁명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발하는 하얀 심지를 보라.
촛불을 남용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특정집단의 정치적 이념을 위해, 정의를 독점한 채 촛불을 앞세운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진정으로 촛불에 감사해 한다면, 겸손한 자세로 그 너머에 있는 심연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국민의 안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또 내일을 기약할 수있느냐는 걱정이 일부에서라도 나온다면 더더욱 겸손해질 일이다. 촛불의 현실을 승화시킬 일이다. 촛불의 유한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나의 사상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게 했던/외피를 불속에서 상실했다./그것은 내가 원인이자 쏘시개가 된/화재 속에서 타버렸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불꽃의 내부이고 중심축이다./중략/··· 하지만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장 드 보쉐르 ‘어두운 자의 마지막 시편’).
※ Gaston Bachelard 'La flamme d'une chandelle'(‘촛불의 미학’, 김웅권 역, 동문선. 2008), Jean Wahl, Roger Asselineau, 프리드리히 니체로부터 촛불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인용한 보쉐르시는 김웅권 번역의 ‘촛불의 미학’에서 재인용한 것임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