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무대에서 홀로 춤을 추던 남자가 눈빛을 바꾸던 순간, 직감했다. ‘아, 저 남자 덕후 깨나 울리겠다’고.
사이비 종교 집단에 맞서 첫사랑을 구하기 위한 뜨거운 촌놈들의 좌충우돌 고군분투를 그린 OCN 오리지널 드라마 ‘구해줘’(극본 정이도·연출 김성수)에서 단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외로운 늑대 차준구였다.
차준구는 후배 이진석의 배신으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막 출소한 조폭. 배우 고준은 자유분방하고 유연한 리듬을 가진 싸움의 고수 차준구를 자신만의 색깔로 연기해냈다.
“유쾌하면서도 살벌한 모습에 반했죠. 획일화된 포맷에서 일탈하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획일화된 악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은 면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로 스크린에서 활약해온 고준인 만큼 한 번에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드라마 속 캐릭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본이 나와 있지 않으니까 그에 대한 어려움도 있죠. 감독님과 구두적으로 말하고 제가 매력을 느낀 부분은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는 점이었어요. 극 중 세계에서는 조폭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인데 시청자들은 그를 ‘착하다’, ‘내 편이다’라고 생각해야하거든요. (보는 이들이)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중요했어요.”
그의 말마따나 차준구는 단순하지 않은 인물이다. 예사롭지 않은 성격을 떠나 선과 악의 경계 선상에 서 있는 캐릭터기 때문. “덕후 깨나 울리겠다”고 거들며, 드라마 및 캐릭터에 관한 기대나 관전 포인트를 물었더니 고준은 “아이러니”이라는 키워드를 내놓았다.
“처음 드라마의 시놉시스를 듣고 확 매력을 느낀 부분이에요. 제목을 듣자마자 ‘누군가 간절히 도움을 원하는데 과연 어떤 이가 타인을 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특히 그 중에서도 모두가 외면하고 선입견을 품는 차준구라는 인물이 도움을 원하는 타인을 구한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더라고요.”
전설의 17대 1의 싸움을 구현하고 단출한 무기로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은 남자들의 로망 그 자체였다. 다수의 작품에서 액션 연기를 펼쳐온 그인 만큼 이번 액션 연기 역시 수월할 것이라 짐작했었다.
“어휴, 이제 힘들죠. 제 나이가 벌써…. 하하하. 저는 한 번도 캐스팅 단계에서 액션에 자신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늘 액션 영화·드라마에 덜컥 캐스팅돼요. 제가 액션을 잘하게 생긴 얼굴인가요? 때마다 감독님들께 물으면 ‘그냥, 운동선수 같이 생겨서 뽑았어’라고 하더라고요. 이제 힘든데 말이에요. 하하.”
공교롭게도 고준은 드라마와 비슷한 시기 개봉한 영화 ‘청년경찰’에서도 싸움의 고수를 연기했다. 영화 속 조선족 영춘이 단단한 액션을 보여줬다면 드라마 속 차준구는 여유롭고 유연한 액션이었다.
“심적으로는 ‘청년경찰’이, 육체적으로는 ‘구해줘’가 더 힘들었죠. ‘청년경찰’ 영춘은 강한 타격은 없어 보이되 타격이 있으면서 실제로는 다치지 않게 때려야했거든요. (강)하늘이랑 (박)서준이가 다치면 안 되니까…. 하하하. 액션스쿨에서도 힘을 빼고 액션하는 걸 연습했어요. 반대로 차준구는 풀어진 연기라 좋은데 영화라면 3일 동안 찍는 걸 하루만에 다 해야하니까. 육체적으로 힘들었죠.”
줄곧 액션 연기를 해왔지만 고준은 “때리는 것보다 맞는 것이 속편하다”며 액션 연기에 대한 부담을 토로하기도 했다.
“때리는 건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막 미안해지고…. 저는 솔직히 액션 연기를 그만하고 싶어요. 데뷔한 지 20여 년이 다 됐는데 (연기 방향이) 액션 쪽으로만 흘러가니까 갈증이 생기더라고요. 연기를 자주 보여드리고 싶은데 액션에 초점이 맞춰지니까 그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요.”
요령 없이 캐릭터를 직접 부딪치고 느끼며 연기한다는 고준. 때문에 그는 늘 작품마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털어놨다.
“주변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작품마다 제가 휙휙 바뀌는 것 같아요. ‘청년경찰’ 때는 영춘의 감정을 유지하느라 말수도 줄이고 장난도 치지 않았었어요. 그런데 ‘타짜2’나 ‘구해줘’는 유연한 스타일이라서 말도 많이 하고 너스레도 많이 떨었죠.”
지레 사투리 자판기일 거라 짐작했었다. 그간 전라도(영화 ‘타짜2’)부터 경상도(드라마 ‘구해줘’), 연변(영화 ‘청년경찰’) 등 다양한 사투리 연기를 완벽하게 구사한 만큼 어떤 요령이나 비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터였다.
“다들 누르면 뚝딱 나올 거로 생각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정말 힘들게 배우고 있어요. 하하하. 제가 연기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어서 사투리를 쓰는 역할을 맡으면 그 지역으로 내려가 살다 오거든요. 회사 도움 없이 개인적으로 준비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차준구의 경우는 경북 사투리를 배우는데 정말 정신병에 걸릴 것 같더라고요. 경남 사투리와 경북 사투리가 다르고 또 경북 안에서도 도시마다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져요. 저는 분명 대구 토박이분에게 사투리를 배웠는데 다른 곳에서 쓰면 틀렸다는 거예요. 너무 혼란스러웠죠.”
혼란에 빠져버린 고준을 끌어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투리의 해결책을 물었더니 그는 마음을 고쳐먹은 한 에피소드를 전해왔다.
“한 번은 대구 토박이인 친구들과 술을 마셨어요. 저를 빼고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같은 대구 사람들끼리 억양이 이상하다며 놀리는 거예요. ‘에이, 대구 사람 아니죠? 서울에서 왔는데 사투리 흉내 내는 거죠?’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깨달았죠. ‘아, 정답이 없구나’ 하하하.”
아직까지 많은 스킨십은 없지만 차준구와 석동철(우도환 분)의 케미스트리 역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상황. 앞으로 두 캐릭터의 어떤 점을 눈여겨보면 좋을지 질문했다.
“글쎄요. 차준구와 석동철은 외로운 늑대들이라서…. 하하하. 위기의 순간 서로 힘을 합치는 모습에 케미가 있지 않을까요?”
인터뷰를 마치며 고준에게 “다시 만날 때까지 지키고 싶은 ‘약속’ 한 가지”를 부탁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제 마음대로 될 수 있느냐”며 웃어버린다.
“아직 보여드리지 못한 색깔이 너무 많아요. 다음에는 조금 더 소통할 수 있는 작품, 캐릭터로 돌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