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전투지휘관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그리고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는 것, 바로 빨치산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과 휴머니즘 정신이었다. 차일혁은 전투 중에는 누구보다 승리에 집착하며, 승리로 이끌었던 상승(常勝)의 전투경찰 지휘관이었다. 전투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용감무쌍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차일혁을 빨치산들은 매번 두려움을 갖고 맞서야 했다.
그렇지만 일단 전투가 끝나면 부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죽거나 포로로 잡힌 빨치산에 대해서도 측은지심을 발휘하여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죽은 빨치산의 시신(屍身)에 대해서는 매장을 해줬고, 잡힌 빨치산들은 양민으로 만들어 고향으로 돌려보내줬다. 총을 겨누며 치열하게 싸웠던 빨치산에 대해서까지 그런 마음을 지닌 차일혁이었기에 부하사랑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부하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그 어떤 지휘관보다 가슴으로 아파했고, 죽은 부하의 주검 앞에서는 늘 몸에 지니고 다닌 염주를 꺼내 돌리며 명복을 빌어줬던 ‘부처님 미소와 마음’을 지닌 인간미가 넘치고, 가슴이 포근했던 특별난 야전지휘관이었다.
차일혁의 그런 마음은 죽느냐 사느냐하는 전쟁터에서의 적(敵)인 빨치산에게도 그대로 나타났다. 차일혁은 전투 중에는 빨치산이 가장 무서워하는 빨치산 토벌대장이었지만, 일단 포로로 잡힌 빨치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관대했던 경찰지휘관이었다. 차일혁은 생포한 빨치산이 있으면 그들을 양민으로 돌려보내려고 나름 독특한 지휘기법을 고안하여 활용했다. 차일혁은 그런 지휘기법은 첫 전투인 구이면 전투 때부터 적용했다. 차일혁의 그런 방법을 적중했고, 커다란 효과를 가져왔다.
차일혁의 경험으로 볼 때 포로로 잡힌 대부분 빨치산들은 “살고 싶은가, 아니면 죽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골수 빨치산들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빨치산에 가담한 자들이었다. 차일혁은 그런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해서 “살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그것은 예상한 대로 적중했다.
차일혁은 살고 싶다고 말한 빨치산 포로들 대부분을 귀순으로 처리해서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포로들 중 전투능력이 뛰어나거나, 고향으로 가도 뚜렷한 생계대책이 없는 사람들은 과감히 부대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빨치산을 토벌할 때 그들을 잘 활용했다. 차일혁은 전향한 빨치산들을 산으로 올려 보내 산속에 있는 옛 빨치산 동료들을 귀순시키도록 했다. 이른바 빨치산으로 빨치산을 잡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이었다. 차일혁은 빨치산 귀순자로 이루어진 부대도 만들어 운용했다. 차일혁 부대가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차일혁은 한국인의 그런 정서에 기대었다. 그래서 포로로 잡은 빨치산 중 골수 공산주의자들에게 “집에 가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아무리 공산주의 사상과 이념무장이 철저히 되어있다 하더라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면 본능적으로 부모님의 얼굴을 한번쯤 떠오르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싶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버텨 낼 한국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쟁터에나 사형수들이 죽어가면서 가장 많이 부른 단어가 ‘부모를 뜻하는 어머니나 아버지’라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효심이 깊고 정감(情感)이 풍부한 한국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생포된 빨치산들도 생사에 기로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향에 가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 마음을 잘 알기에 차일혁은 이념무장이 철저하게 된 빨치산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런 기회를 주고, 그들이 조금이라도 전향할 마음을 발견하면 귀순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했다. 차일혁은 열(熱)과 성(誠)을 다해 포로로 잡은 빨치산에 대해서 가급적 양민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따뜻한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말과 행동이었다. 차일혁이 그럴 때마다 차일혁 부대의 전과(戰果)는 줄어들었다. 포로를 양민으로 귀순시키니 차일혁 부대의 전과 중 포로들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차일혁이 독단으로 포로를 귀순 조치하는 것에 부하 대원들은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차일혁 부대에서는 대장인 차일혁의 행동에 대해 섭섭하다거나 서운하다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일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 느껴졌다. 차일혁의 부하 대원들은 차일혁이 어떤 조치를 취하든 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따르며 복종했다. 차일혁은 전투지휘에서는 거짓이 없었고,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차일혁 부대에서는 상하 간에 알력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차일혁의 부하대원들은 부대장인 차일혁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며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일혁이 어떤 일을 하든 불평이나 불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그런 상황이 되면 오히려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빨치산을 생포하면 1계급 특진(特進)의 영예가 주어졌다. 그것은 커다란 전과요,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부대에서는 빨치산을 생포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한번 생포한 빨치산에 대해서는 아무리 부대장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놓아줄 수 없었다. 그만큼 전과가 줄어들고, 거기에 따라 개인이 받을 특진의 기회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포로 1명을 놓아주면 포로를 잡은 대원에게 전공을 포기하라는 것과 똑같은 행위였다. 그러기에 다른 부대에서는 공적을 둘러싸고 여러 번 문제가 발생해 상급기관에서 조사를 벌이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차일혁의 부대에서는 그런 일이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차일혁의 부하들은 오히려 차일혁의 그런 조치를 신뢰하며 존경하기까지 했다. 차일혁이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온당한 처신이 한몫했다. 차일혁은 부하들이 애써 잡은 포로들을 양민으로 귀순시키거나 부대원으로 전향(轉向)시키는 대신, 자신에게 내려오는 포상(褒賞)들을 가급적 부하들이 받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부하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자신이 무한 책임을 졌다. 차일혁은 부하들이 피해를 입는 상황에서는 동료는 물론이고 상급자에게까지 맞서며, 부하들의 이익을 지켜주려고 했던 집안의 형님이나 아버지 같은 역할을 자임(自任)해서 했다.
그런 차일혁에 대해 대부분의 상급자들은 이해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일부 상급자들은 이를 아주 못마땅해 하며 입맛을 쩍쩍 다시곤 했다. 그리곤 언젠가 혼낼 기회를 엿보았다. 그렇지만 차일혁의 부하들은 달랐다. 부하들은 차일혁이 정도(正道)를 걷는 것에 언제나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차일혁이 무조건 부하들을 믿었듯이, 부하들도 차일혁을 한 없이 믿고 따랐다. 이는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과 차일혁 부하들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인간 하모니’였다. 차일혁의 짧은 생애에도 그를 오랜 시간 추모하고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신뢰와 존경 그리고 사랑과 전우애’가 하모니를 이루며 ‘악기 없이 연주되는 차일혁과 차일혁 부하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인간 합주(合奏)’가 마냥 그리워진다. 차일혁에게서 풍겼던 무색무취(無色無臭)한 인간선행의 내음이 백화만초(百花蔓草)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향기보다 더욱 뛰어난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