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블룸버그통신(Bloomberg)과 파이낸셜타임즈(FT) 등에 따르면 지난 14일 리 전 총리의 장녀 리웨이링(李瑋玲)과 차남 리셴양(李顯陽)은 페이스북을 통해 리셴릉 총리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페이스북에 올린 성명서를 통해 이들은 리 총리가 리콴유 우상화를 통해 아들 리홍이(李鴻毅)에게 권력 세습을 시도한다는 지적이다.
이어 “2015년 3월 23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우리는 리셴릉이 자신의 지위와 싱가포르 정부 및 정부기구에 미치는 영향력을 악용해 자신의 개인적 의제를 추구하는 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면서 “도처에 ‘빅 브러더’가 있다고 느끼고 리셴양이 싱가포르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또 “우리는 매우 불안하고 밀착 감시당하고 있다고 느낀다”며 “리셴룽을 형제로서도 지도자로서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에 리 총리도 반박 성명을 통해 “형제와 자매들이 사적인 가족사를 내보이는 성명을 내기로 한 데에 크게 실망했다"며 "형제 간에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문제는 가족 내에 머물러야 한다고 믿는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현지 정치권 관계자들은 싱가포르의 권력구조가 오랜 전부터 리 전 총리의 독재 시스템으로 고착화돼 세습 논란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 2015년 3월 타계한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린다. 아시아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강력한 법치와 청렴한 제도로 싱가포르를 선진국의 반열에 올렸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독재 체제를 변형한 아시아적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싱가포르 정치 발전에 오점을 남겼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이 부분은 특히 지난 1994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리 전 총리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놓고 미국 정치·외교 전문 매체인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를 통해 논쟁을 펼친 사례는 매우 유명한 일화다.
리 전 총리는 당시 ‘문화는 숙명이다(Culture is Destiny)’ 기고문에서 “외국의 제도가 적용될 수 없는 곳에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지 말라”며 “아시아와 서구 유럽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서구 개념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시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 가치를 지닌 개념이라며 리 전 총리의 주장을 반박한 바 있다.
다음은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http://www.kdjlibrary.org/)에 게재된 김 전 대통령의 기고 논문 전문.
문화란 운명인가(Is Culture Destiny)
싱가포르의 전직 수상 이광요 씨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1994년 3~4월호 109~126쪽)에 인터뷰를 하였는데, 여기에서 이광요 씨는 서구사회와 동아시아 사회와의 문화적 차이와 이의 정치적 의미에 관해서 흥미있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비록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인터뷰 전반을 통한 그의 발언내용과 자신의 과거 행적을 보아 그가 미국 사람들에게 “외국의 제도를 적용할 수 없는 곳에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지 말라”고 충고한 것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동아시아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의미함이 틀림없다.
그가 세계의 지도자들 중 능력 있는 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과 이 인터뷰가 실린 학술지의 권위를 생각할 때, 그의 이같은 주장은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고 따라서 신중한 분석이 요구된다.
1991년 소연방이 붕괴됨과 더불어 1848년 공산당선언으로부터 시작된 이데올로기의 대결이 끝나고 정치 패러다임으로서의 사회주의는 후퇴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승리한 결과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같은 변화가 민주주의의 승리이고 독재주의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프러시아 독일과 명치 일본에서 보여주었듯이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를 거부하면서 자본주의만 수용했던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도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와 반대로 민주적 자본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실천한 국가들은 비록 일시적 어려움은 있었지만 모두 다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계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와 서구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아시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아시아에 민주주의의 장래를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의문은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주로 제기하고 있는데, 이광요 전 수상이 그 중 가장 논리적인 대변자이기도 하다.
그들은 아시아와 서유럽 간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서구 개념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시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아시아에는 민주주의의 철학적 역사적 배경이 있는가? 민주주의가 아시아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인가?
1. 이광요 씨의 견해
이광요 씨는 인터뷰 전반을 통해 문화적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나도 문화의 중요성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문화적 요소만이 한 사회의 운명을 결정한다거나 한 사회의 문화가 불변하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또한 아시아의 문화에 대한 이광요 씨의 견해는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지를 위해 견강부회한 감이 없지 않다. 그는 동양사회는 서구사회와 달라서 개인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며 가족이 사회구성의 기초단위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로서 ‘가족중심’적이라는 동양사회도 이기적 개인주의로 급속하게 전환하고 있다. 인간 역사에서 영원불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광요 씨는 또한 동양에서는 “가족이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통치자나 정부가 제공해 주려고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같은 소위 자주적이고 가족중심적인 문화가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공의 주요인이라고 지적하면서 서구사회의 정부들이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 든다고 비웃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서구사회에서 지나친 민주주의와 지나친 개인의 권리가 도덕의 궤멸을 가져왔다고 걱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광요 씨에 의하면 개별 가족의 일에 개입하려 드는 정부형태를 가진 서구식 정치제도는 가족중심적인 동아시아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근대화와 그에 따르는 생활 양상의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서구화를 거부하고 있어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과연 이광요 씨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아시아의 정부들은 개인의 사안에 개입하려 들지 않고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떠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 진실은 그와 정반대다. 아시아의 정부들은 서구의 정부들에 비해 개인이나 가족의 일상 사안에 대해 훨씬 더 깊이 개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각 가정마다 의무적으로 매월 반상회에 참여하여 정부의 지시를 받고 동네의 문제에 대해 토의를 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정부가 국가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경제계의 일에 깊이 간여하고 있어 미국이나 다른 교역대상국들과 마찰을 일으키기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이광요 씨의 싱가포르에서는 풍선껌을 소유하는 것, 침 뱉는 것, 흡연, 쓰레기 버리는 것 등과 같은 개인의 행동을 매우 엄격하게 규제하여 ‘조지 오웰의 사회’를 방불케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시아의 정부들이 비개입적이라고 하는 그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이광요 씨가 이렇게 그릇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서구의 정치제도, 즉 민주주의를 거절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근대 민주주의의 근본이 되는 1인1투표제도 그것이 최선의 것이라는 논리적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서 이 원칙을 부인하고 있다.
이광요 씨의 이와 같은 주장은 선진민주국가에서의 도덕의 붕괴현상 때문에 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서구사회에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예를 들어 싱가포르에서 자동차를 훼손한 대가로 미국의 10대 소년 마이클 훼이군을 태형에 처한 것을 많은 미국 시민들이 지지하였다).
그러나 도덕의 붕괴현상은 서구문화의 본질적 단점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가 사회에서도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그마한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에서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전체주의와 흡사한 경찰국가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정부가 가족의 사안을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두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이광요 씨의 주장을 강하게 반증하고 있다. 산업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적절한 방법은 경찰국가의 공포에 의한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윤리교육을 강조하고 정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문화예술의 수준을 높이는 정책이다.
2. 아시아의 문화와 민주주의
문자 그대로 본다면 이질적인 제도를 “적용할 수 없는 사회에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지 말라”는 이광요 씨의 주장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아시아의 문화에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서 적용이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광요 씨가 반대여론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에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또한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보다 철저한 분석을 해보면 아시아엔 민주주의적인 철학과 전통이 풍부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아시아는 민주화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을 하였으며, 서구 민주주의보다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1) 민주주의적 사상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웠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로크의 이론에 의하면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들과의 계약에 의거하여 지도자들이 통치권의 위임을 받는데, 통치를 잘하지 못했을 경우 이 통치권이 철회될 수 있다.
그러나 로크의 이론보다 거의 2천 년 앞서 중국의 철학자 맹자는 그와 비슷한 사상을 설파한 바 있다. 맹자가 주장하는 왕도정치의 이론에 의하면 왕은 하늘의 아들로서 좋은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임무를 하늘로부터 위임 받았다. 왕이 악정을 하면 국민은 하늘의 이름으로 봉기하여 왕을 권자에서 몰아낼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맹자는 심지어 옳지 않은 왕을 죽이는 것까지도 인정하였다. 폭군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를 물었을 대 맹자는 왕이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을 잃게 되면 백성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으며, 백성이 첫째이고 국가(사직)가 둘째이며 그 다음이 왕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민본정치 철학에 의하면 “민심이 천심이다”라고 했으며 “백성을 하늘로 여겨라”고 가르치고 있다.
한국의 토착신앙인 동학은 그보다 더 나아가 “인간이 곧 하늘”이라고 했으며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같은 동학정신은 1894년에, 봉건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착취에 대항하여 거의 50만이나 되는 농민들이 봉기를 하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같이 유교와 동학의 가르침보다 민주주의에 더욱더 근본적인 사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시아에도 서구에 못지않게 심오한 민주주의의 철학적 전통이 있음이 확실하다.
2) 민주적 제도
아시아에도 또한 민주주의적인 전통이 많이 있다. 서구사회들이 강자에 의해서 지배되거나 봉건영주들이 세습적으로 통치하던 원시적 상태에 있었을 때, 중국과 한국에서는 군현제도를 약 2천 년간이나 실시해 왔다. 진나라에서는 법치주의를 실행하여 신분과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공정하고 평등하게 취급되었다.
그리고 거의 1천 년 동안 고위 관료들의 자식들도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중요한 공직에 임명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시험제도의 의의는 결코 가볍게 취급될 수 없다. 이 엄격한 시험제도는 전체 인구의 10%를 넘는 양반계급에 실시되어 민주주의의 핵심이 되는 기회의 균등과 사회계층의 유동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었다.
이러한 제도는 대체로 출생신분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했던 유럽의 봉건제도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중국과 한국에는 강력한 견제기관이 있어 왕의 실책과 고관의 권력남용을 견제하였다. 언론의 자유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생각으로 높이 평가되었으며, 유림들은 왕의 잘못에 대해 간하는 것이 학자로서의 중요한 의무라고 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많은 관리와 선비들이 언론자유의 권리를 행사하고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필요한 기본사상이 유럽에뿐만 아니라 아시아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양자 간의 차이는 아시아에서 이같은 사상을 훨씬 먼저 효과적이고 포괄적인 선거 민주주의로 제도화했다는 것이다.
선거제도의 개발은 유럽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이같은 민주제도가 다른 데에서 발전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아시아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왜 싱가포르를 포함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주의와 더불어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식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하여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경제발전이 정치발전보다 앞선 아시아의 국가들에서도 우리가 독일,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 등의 에에서 보아 온 것처럼 민주화가 뒤따르는 것은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3) 아시아 민주주의의 현황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가장 좋은 증거는 이광요 씨와 같은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민주화가 크게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에 의하면 1974년 이래 아시아에서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가장 괄목할 만한 민주화의 기록을 달성했으며, 1990년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민주화율이 45%였음에 비하여 아시아에서는 다수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민주화의 성과가 아시아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이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음 세기 초에는 아시아 전역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다음 세기의 제1/4분기에는 아시아에서 경제적 번영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이같은 낙관적 생각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 근거한다.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자본과 능동집약적인 산업체제에서 정보와 기술집약적인 체제로 변해가고 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같은 새로운 세계경제질서 하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보장되어 정보가 물흐르듯이 막힘 없이 흐를 수 있어야 하며 창의력이 억제됨이 없이 발휘되어야 한다.
이같은 것들은 민주적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는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방법 외에 현실적 대안이 없다. 민주주의는 이제 치열한 경쟁의 시대로 접어든 세계경제질서에서 살아 남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세계경제체제가 정보와 기술 위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정보의 흐름이 그만큼 커졌고 쉬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또한 아시아의 민주화과정을 크게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차 대전이 종식된 이래 일본과 인도에서는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한국, 미얀마, 대만, 태국, 파키스탄, 필리핀,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의 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좌절 또는 중단된 기간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민주화가 되었으며, 모든 국가에서 소위 ‘피플 파워’로 알려진 시민들의 민주역량이 선거와 대중운동 등을 통해 과시되었고, 민주주의가 끈질긴 생명력이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태국에서는 또한 10번의 군사정부가 들어선 이후 마침내 민간정부가 다시 탄생했다. 그리고 몽골정부는 오랜 기간의 일당독재를 청산하고 자발적으로 민주주의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내가 낙관적 견해를 갖는 근본적 이유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에 대한 아시아 사람들의 인식이 이처럼 향상되고 있으며, 이를 실현시키는 데 필요한 노력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의 횃불은 수많은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인들의 열망에 의해 꺼짐 없이 밝게 타오르고 있다.
3. 지구적 민주주의를 향해
아시아인들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점점 더 많이 수용하고 있으나 우리는 기존의 민주국가들로부터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고,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기도 하다. 서구사회는 민주제도를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경험하였다. 예를 들어 서구의 국가들은 자신의 민족국가 영역 내에서는 민주주의를 실천하였으나 그 밖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서구의 민주국가들은 근래까지만 해도 소수 부유계층의 이익만을 주로 대변하고 있었다. 좀더 폭넓은 다수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주로 2차 대전 이후에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저개발국가들을 포함한 모든 국가간에도 자유와 번영과 정의를 도모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출해 내야 한다.
급격한 산업화로 야기되는 사회적 교란에 대해 서구의 문화를 희생양으로 삼기보다는 아시아 사회의 전통적 장점을 찾아내어 그것이 어떻게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좀 더 합당한 일이다. 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는 자주성을 좀 더 장려해야 하고 문화적 가치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민주주의만이 국민의 의사를 참되게 반영하는 것이며, 이는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빠지지 않고 참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민주주의는 그 국민의 비전을 반영할 수 있고 정통성을 갖는 지구적 민주주의로 승화될 수 있다.
아시아의 권위주의자들은 정통성의 문제에 이어서 효과적 통치의 방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따르는 부작용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려는 정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민의 동의 없이 강요된다면 결코 효과적일 수 없다. 그러나 이와 똑같은 정책이 국민적 토의를 거쳐 합의로 도출해 낸 것이라면 긍지를 가진 자주적 국민의 힘이 뒷받침해 줄 것이다.
지구적 민주주의는 우리가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 자연을 존중해 주는 것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며, 후세대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추구해 나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동식물에 파괴의 위기를 가져다주었고 환경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참다운 형제애로 감싼다는 의미의 지구적인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널리 알려진 유교의 금언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또는 ‘태평천하’는 훌륭한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금언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유교 정치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천하)평화의 실현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가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으려면 자신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정치철학으로서(예를 들어 치안 및 국방과 더불어 치산과 치수는 유능한 임금의 필수요건으로 간주되었다) 세계평화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지배계층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평화(태평천하)의 개념은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이 평화스럽게 살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사상은 “일체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이래 인류는 일련의 사상혁명을 경험하였다. 중국, 인도, 그리스, 이스라엘의 사상가들이 위대한 사상의 혁명을 주도하였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들의 심오한 사상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특히 지난 수백 년간 인류는 그리스와 기독교 사상의 지배적 영향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류가 중국과 인도 등의 아시아의 사상에서 새로운 정신혁명의 원천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자기발전의 권리를 보장받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과 무생물가지도 건전한 존재의 권리가 보장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첫걸음은 1948년에 UN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을 완전하게 준수하는 것이다. 이 국제문서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기본적 존중을 반영한 것으로서, 아시아 국가들이 이의 실천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은, 소수이지만 헌신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효과적인 집단(정당과 비정당을 포함한)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으며, 세계 전역으로부터 민주발전을 위한 민간기구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 또한 나의 낙관적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집단들은 정부로 하여금 국민의 관심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역량을 키워 나가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지원해 줄 필요가 있다.
아시아에는 아직 해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우리는 시급히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인권을 개선해야 한다. 여기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요소는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지도자들과 변명자들의 저항이다. 실은 아시아가 다른 지역에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아시아의 풍부한 민주주의적인 철학과 전통은 지구적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다. 문화는 반드시 우리의 운명일 수만은 없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