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1905년 2월 문학산 계곡의 빗물을 저장하는 수원지 조성 계획을 세웠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8월에 공학박사 나까지마(中島)가 경인 수도 시설을 위한 실지 답사를 바탕으로 한강 연안의 노량진이나 뚝섬을 수원지로 해서 서울, 용산, 인천에 급수를 할 수 있는 수도 계획을 수립하고 1906년 11월 공사에 착수했다.
1910년 10월, 노량진에 수원지 정수시설이 준공되자, ‘노량진~인천’ 사이에 32.62㎞의 수도관을 부설하고,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인천으로 급수를 시작했다.
서울 영등포 지역의 급수가 1914년 12월 24일에 개시된 것을 감안하면 인천이 4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정수된 수돗물이 인천에 급수된 곳은 송현배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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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송현배수지[사진=인천시]](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7/05/04/20170504085027101967.jpg)
일제강점기의 송현배수지[사진=인천시]
동구 송현동에 위치한 배수지는 인천 최초의 상수도 시설로 표고 56.8m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부지면적 3만6780㎡이고 5000㎥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었다.
현재 제수변실과 23단의 화강석으로 된 장대석 계단, 철제 정문 등이 남아 있다.
제수변실은 배수지에서 배수관의 통수(通水)나 단수(斷水), 또는 유압 조절 기능을 담당하는 제수밸브를 보호하는 시설물이다. 일체식 무근콘크리트의 원통형 구조를 하고, 상부를 페디먼트로 장식한 출입구와 창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제수변실은 원통형으로 그 깊이가 상당히 깊은데, 이는 각 가정으로 물을 보내는 송수관이 배수지 바닥 부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수지의 깊이는 4.38m, 유효수심은 3.6m이었다.
1931년 당시 1만톤 정도가 급수되었는데, 요금은 월 최저 12톤에 2원(당시 쌀 1되에 20전)으로 물값이 상당히 비쌌음을 알 수 있다.
출입 철문은 화강석 위에 콘크리트 기둥을 심고 4각 모양과 둥근 화강석의 받침이 만들어져 있다. 출
입구 위에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깨끗하다’라는 뜻의 ‘만윤백량(萬潤百凉)’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제수변실은 2003년 11월 10일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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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사진=인천시]](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7/05/04/20170504085120431534.jpg)
현재의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사진=인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