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7-02-2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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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 지리산에 평화를 가져다 준 전투경찰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빨치산 토벌을 통해 대한민국 후방을 안정시키고, 민족의 영산 지리산(智異山)에 평화를 가져다 준 전투경찰로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지리산은 빨치산 토벌의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지리산이 빨치산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여순10·19사건과 관련이 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의 지창수·김지회·홍순석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들은 여수는 물론이고 인근의 순천까지 점령하며 기세를 떨쳤으나, 얼마못가 군경(軍警)에 의해 소탕됐고, 잔당들은 지리산으로 피신을 하게 됐다. 이때부터 지리산은 빨치산의 소굴이 됐다.

 6·25전쟁이 터지자 지리산은 빨치산들의 총지휘부 역할을 하면서 그들의 활동 근거지가 됐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에는 다양한 빨치산들이 활동했다. 미 군정시절부터 활동했던 야산대(野山隊), ‘여순10·19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란군 잔당들로 구성된 ‘구(舊) 빨치산’, 6·25전쟁 이후 지리산으로 숨어든 ‘신(新) 빨치산들’이 그것이다. 6·25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 경상·전라·충청지역의 골수 공산주의자들이 지리산으로 입산하면서 빨치산들의 세력은 커졌다. 이들을 지휘하던 빨치산 총책은 전북 금산(1963년 전북에서 충남으로 편입) 출신의 공산주의자 이현상(李鉉相)이었다. 이현상은 북한 부수상이자 외무상인 박헌영(朴憲永)의 심복이었다. 박헌영은 북한에서 김일성 다음가는 서열 2위였다.

 이현상이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꽤 오래됐다. 이현상은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사건 이후인 1949년 6월, 지리산으로 들어와 유격대를 조직했다. 반란 주동자들이 처형된 후 오합지졸이 된 반란군 600명을 규합하여 지리산에서 정식으로 유격대를 결성한 것이다. 이현상은 지리산뿐만 아니라 인근의 재산공비(在山共匪)들과 야산대도 합쳐 덕유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현상은 1949년 11월 15일 새벽 3시, 무주경찰서를 습격하며 무주를 공포를 떨게 했다. 이때부터 이현상은 ‘공산빨치산’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이현상이 빨치산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이현상은 지리산 일대의 산세(山勢)에 밝았고, 조직 관리를 잘했으며, 게릴라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현상이 일제시대 고향 금산과 가까운 덕유산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며 지리산 등지의 산세를 익히며 게릴라전에 대한 연구를 깊이 했기 때문이다. 또 고창고보(高普)시절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해 지하 노동운동을 하면서 조직 관리에 많은 경험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는 6·25이전부터 입산활동과 실전경험이 많은 구 빨치산들이 보좌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이현상은 토벌부대인 군경에 오랫동안 막대한 피해를 주며 빨치산 총책으로 활동하게 됐다.

 그런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차일혁에게 걸려들었다. 차일혁은 전북지역의 빨치산을 토벌하고, 지리산의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설치된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에 보직됐다. 그때가 1953년 5월 15일이다. 지리산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던 이현상과 차일혁과의 일전은 이제 불가피해졌다. 차일혁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현상에게 지난 참패에 대한 설욕을 해야 했다. 이현상에게 꼭 되돌려 주어야 할 빚이었다. 그리고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 평화를 찾아주어야 했다.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과 빨치산 총책 이현상과의 결전이 다가왔다. 지모를 이용해 군경의 토벌을 요리저리 피해 다니는 이현상이 ‘지리산의 여우’라면, 맹호처럼 이를 뒤쫓는 차일혁은 ‘지리산의 호랑이’였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현상과 지리산 평정에 대해 관심이 컸다. 이 대통령은 “지리산의 평정 없이는 남한의 평화가 없고, 이현상의 생포 없이는 지리산의 평정도 없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지리산 평정과 남한의 평화를 위해서는 이현상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이제 그 임무가 차일혁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독립군 시절부터 몸에 밴 전투지휘능력, 다년간 산야를 누비며 터득한 빨치산 토벌경험, 이현상부대에게 뼈아픈 첫 패배을 당한 ‘인연’ 등을 고려할 때 이현상을 때려잡을 최적임자는 차일혁 뿐이었다.

 이현상은 차일혁에게 첫 패배를 안겨줬던 유일한 빨치산이었다. 차일혁으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1951년 10월 차일혁 부대는 무주 구천동에서 이현상 부대에게 처절하게 당했다. 제18전투경찰대대 창설 이래 최초의 패배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차일혁이 전투를 못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 빨치산과 내통한 주민들이 차일혁 부대에게 며칠 전 빨치산들이 이곳을 떠나서 마을에 없다는 거짓정보에 속아 마을로 들어갔다가 그곳에 매복해 있던 빨치산들에게 그대로 당한 것이다. 이때 차일혁은 공비들에게 희생당한 대원들의 시신 앞에서 사나이의 값진 눈물을 흘리며 굳게 다짐했다. “이현상만은 꼭 내 손으로 잡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그만큼 부하들을 잃은 아픔이 컸다. 그때부터 차일혁은 이현상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지리산 평정 임무를 맡은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은 이현상 ‘생포작전’에 돌입했다. 차일혁은 이현상이 있을만한 곳을 집중수색하며 범위를 좁혀갔다. 이른바 타초경사(打草警蛇) 전법이었다. 나무로 풀을 쳐서 뱀을 놀라게 한 뒤 달아나게 하는 방법이다. 중국의 병법 36계(計)에 나온다. 차일혁도 그런 방법을 썼다. 주변으로부터 중심부로 작전범위를 압축해 갔다. 그때마다 이현상의 경호원, 비서, 의사(醫師) 등 측근들이 하나둘씩 체포됐다. 심문을 통해 차일혁은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의 최근 소재지도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드디어 이현상이 숨어 있을 만한 곳으로 판단된 곳에 수색대를 매복시켰다. 빗점골이었다. 차일혁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이현상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차일혁의 수색대에 걸려 사살됐다. 비록 생포는 못했지만 지리산으로 들어온 이후 6년간 빨치산 총책으로 지리산을 핏빛으로 물들게 했던 이현상이 드디어 제거됐다. 차일혁은 상급부대인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에 즉각 보고했다. ‘백두산호랑이’로 알려진 김종원(金宗元)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관은 서울 출장으로 부재중이었다. 하지만 이현상 사살 보고는 지체함이 없이 촌각을 다투며 보고됐다. 치안국을 거쳐 신속히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다. 뒤이어 이현상의 시신도 서울로 보내졌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이현상의 사살을 놓고 군과 경찰이 다퉜다. 서로 자기들의 공이라고 우겼다. 양쪽은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급기야 정부에서는 합동진상조사단까지 운영했으나 결론을 매듭짓지 못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나서서 이현상 사살은 경찰의 공적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논공행상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현상 사살과 무관한 내무부장관과 치안국장, 치안국 작전참모,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관 등이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되고, 이현상 사살의 1등 공로자들인 차일혁과 수색중대장은 최하등급인 화랑무공훈장이 주어졌다. 처음부터 차일혁은 전공에 연연치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전투과정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한 1대대장 김동진 경감에 대한 일계급 승진과 명예회복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너무한 처사였다.

 전북일보의 김만석 기자가 보다 못해 차일혁을 찾아와 “차 대장은 현지 부대장으로 일등 공훈을 세우고도 어떤 이유로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소. 당신이 가장 높은 상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소? 현지 지휘관이었던 차 총경보다 사령부 작전과장이 더 큰 상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현지에 있지도 않고 서울에 올라가 도지사운동이나 하던 김종원 사령관이 자기만의 공로인 양 으스대는 것을 정말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분을 삼키지 못했다. 김만석 기자의 볼멘소리에 차일혁은 “훈장을 받고자 공비토벌을 한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며 달랬다. 차일혁은 서로가 자기의 공이라 내세우는 인간 군상(群像)의 행태를 보면서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일혁은 살해당한 김동진 경감이 총경으로 추서되자 다른 어떤 훈장을 받는 것보다 기뻐했다.

 하지만 국가의 상훈은 공정해야 한다. 특히 국가의 품격과 국가존망이 걸린 무공훈장은 더욱 더 공정을 기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 위기 시 누가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목숨을 바칠 것인가? 그리고 후세들에게 무엇을 교훈으로 남길 것인가? 누구를 영웅으로 또는 역사의 가치 있는 인물로 자랑스럽게 말할 것인가? 이현상 사살로 태극무공훈장이 아예 수여되지 않았다면 몰라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면 이제라도 이를 바로 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이현상 사살과 전혀 무관한 내무부장관, 치안국장, 치안국 작전참모,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사령관이 받은 태극무공훈장은 회수돼야 한다. 훈장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국가가 개인의 공적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수여됐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차일혁은 전공을 다투지 않았고, 훈장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국가는 이제라도 차일혁 2연대장과 수색중대장에게 이현상을 사살한 전공과 지리산에 평화를 가져 온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해야 한다. 경찰청은 ‘훈장 바르게 돌려주기 운동’을 전개해서라도 이를 시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몰랐다면 모르되, 이제 알았으니 개선하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일 것이다. 호국경찰, 민주경찰, 위민경찰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선배들의 업적과 공적을 널리 알리고, 이를 통해 제2의 차일혁 같은 경찰들이 많이 나왔을 때 경찰도 희망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호국경찰, 민주경찰, 위민경찰로서의 경찰의 위상과 전통도 확고히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이현상이 없는 지리산의 빨치산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지리산의 빨치산은 이내 소탕됐다. 그 여파로 드디어 지리산에 평화가 깃들게 됐다. 1955년 4월 1일 지리산에 온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이날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는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히 섬멸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리산의 ‘진정한 평화’는, 이현상 사살로 지리산에 평화를 가져 오게 한 차일혁에 대한 태극무공훈장 수여와 그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이뤄질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리산에 평화를 가져 온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 경무관에게 빠른 시일 내에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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