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에서 '대한민국'을 엿보다..한국전망대·덕혜옹주결혼비·최익현순국비

2017-01-3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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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풍경과 한국의 전통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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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망대/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한국 전망대/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필자는 대마도(쓰시마 섬)를 다니면서 대마도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풍경과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취재했다. 먼저 처음으로 간 곳은 '한국 전망대'. 나가사키 현 대마도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 전망대는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한국형 건축물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전망대에서 부산 광안리와 해운대가 뚜렷이 보이며 밤에는 광안대교의 야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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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망대서 바라본 부산 방면 바다/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한국 전망대서 바라본 부산 방면 바다/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대마도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49.5km로 매우 가깝다. 예전에는 故 조오련 수영선수가 헤엄을 쳐서 건너온 대한해협이기도 하다. 가까운 거리인 만큼 수평선 너머로 부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또한 사진의 우측에 보이는 건축물은 일본 해상자위대 레이더 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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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이미지 제공=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왕녀인 덕혜옹주 결혼비가 있는 역사 유적지다. 덕혜옹주는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1925년 3월 24일 동경 유학을 떠나게 된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낯선 이국의 땅에 발을 디뎠다. 이후 조선의 백성들이 크게 분노한 소식이 전해진다.  1931년 5월 8일 덕혜옹주가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이 결혼은 일제에 의한 정략결혼으로, 덕혜옹주는 일본인 아내를 맞은 영친왕과 같은 운명을 밟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덕혜옹주는 결혼 후 조현병(정신분열증)에 시달렸으며, 1946년에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다케유키는 경제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아 더 이상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고 덕혜옹주는 법적 보호자였던 영친왕과의 합의를 통해 다케유키와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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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결혼비/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덕혜옹주 결혼비/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위의 사진은 덕혜옹주의 결혼비다. 1945년 해방 이후 덕혜옹주는 어린 소녀 시절을 보낸 고국의 궁궐에 가기를 원했다. 이 무렵 서울신문의 김을한 기자가 덕혜옹주의 소식을 듣고 덕혜옹주의 귀국을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껴 덕혜옹주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다시 원서를 올려 덕혜옹주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약 37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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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선생 순국비/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최익현 선생 순국비/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이어 방문한 곳은 최익현 선생 순국비다. 최익현 선생은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구국 의병항쟁의 불씨를 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일제 강점기의 민족운동 지도이념을 계승했다.
최익현 선생은 총과 칼, 탄환을 모으고 군사를 일으켰다. 또한 일제의 16개 죄목을 들어 국권의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내기도 했다. 의병의 수가 5백여 명을 넘게 되어 힘을 얻은 최 선생은 파죽지세로 곡성을 거쳐 남원으로 밀고 들어가려 했으나 남원 방비가 워낙 견고했기 때문에 순창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의병은 8백여 명으로 불어났고, 4월 20일 광주 관찰사 이도재가 사람을 보내 황제의 칙지를 전해왔다. 선생은 큰 기대를 갖고 칙서 펼쳐 보았으나 그 내용은 엉뚱하게도 의병을 해산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선생은 반발하며 다시 남원 진입을 꾀했다.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가 왜군이 아니고 우리 측 진위대임이 확인됐다. 진위대측은 의병을 해산하라는 통보를 세 차례나 보내왔고 선생은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아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했으며, 선생 곁에 끝까지 남은 의병은 12명뿐이었다. 4월 23일 선생 등 의병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렇게 최익현 선생의 ‘대마도 감금 3년’ 유배가 떨어지고, 선생은 1906년 11월 17일 단식 끝에 일본에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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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선생 순국비/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최익현 선생 순국비/사진=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상단의 이미지는 최익현 선생 순국비와 바로 앞에 놓인 동전함이다. 일본의 동전인 엔화보다 우리나라의 원화 동전들이 더욱 많다. 수선사 마당에는 최익현 순국 비와 함께 선생을 소개하는 글이 돌에 새겨져 있다. 뜻은 “면암 최익현 선생은 대한제국의 위대한 유학자요, 정치가였다. 한말의 어려운 정세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애국 항일 운동을 일으켜 일본 관헌에 의해 쓰시마로 호송되어 왔으며 유배지 옥에서 순국했다"이다. 

수선사 창건에는 백제 비구니 스님 법묘가 관여한 것으로 전해져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 최익현 선생이 순국한 후 쓰시마 유지들이 유체를 모시고 충절을 되새겨 제사를 올렸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바닷길로 약 1시간~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대마도에 여행을 간다면,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힘쓰신 분들을 기리는 역사적인 유적지를 한 번 찾아가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4기 서삼경 기자(아주경제 명예기자)
편집=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조시영 대표(아주경제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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