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프래그머티즘 트럼프 vs 실사구시 시진핑, 두 맹수의 밀당

2016-12-0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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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전통적인 미국 특유의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에 더해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채, 무서운 기세로 단숨에 미국 정상에 오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마오쩌둥(毛澤東)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글로벌 강국으로 무섭게 굴기하고 있는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두 지도자가 내세우는 실용주의와 실사구시는 서로 일맥상통한다. 유사한 DNA를 지닌 '거친 두 맹수'의 '고차원 밀당'이 시작됐다.
 

지난달 9일 미국 대선에서 승리를 확정지은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사진=신화통신]


◆시진핑, 당선 5일만에야 축하전화

트럼프가 미국 대선 당선을 확정지은 것은 지난달 9일이다. 대선 기간동안 트럼프를 마뜩잖아했던 각국 지도자들도 당선이 확정되자 앞다퉈 트럼프에게 당선축하 전화를 걸었다. 기민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달 1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통화를 하고 일주일 후인 17일 미국 뉴욕에서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트럼프와 회동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멕시코, 이집트, 터키, 인도, 호주, 아일랜드, 영국의 정상도 당선직후 전화를 걸어 당선을 축하했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급기야 트럼프는 11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전 세계 대다수 정상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지만 시 주석과는 아직 얘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례적으로 시 주석을 꼬집어 통화를 못했다는 불만을 표한 셈이다.

트럼프의 발언 이후에도 시 주석은 3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트럼프 당선 5일 후인 14일에야 비로소 트럼프에 전화를 걸었다. 시 주석은 트럼프 당선인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고, 트럼프 역시 덕담을 건넸다. 시 주석이 트럼프에 가벼운 잽을 날린 셈이다. 트럼프로서는 당선 2일 후에 시 주석과 통화를 못했다는 사실을 공개했고, 당선 5일째에야 통화가 이뤄지면서 모양새가 살짝 구겨졌다.

◆돈다발 들고 중남미 종횡무진, 트럼프 견제

시주석은 18일부터 20일까지 에콰도르, 페루, 칠레 등 미국의 뒷마당인 남미 3개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19일과 20일 양일동안에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열린 제24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순방한 국가마다 두둑한 선물보따리를 풀어놓았던 시 주석의 일관된 메시지는 '보호무역 지양'이었다. 세 남미국가의 지도자들은 반색하며 ‘보호무역 반대’를 외쳤다.

APEC 회의에서도 시 주석은 기조연설에서 "아태 지역은 보호무역주의의 도전과 무역 성장 정체에 직면해 있으므로 배타적인 무역 협정은 옳은 선택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 건설을 촉구했다. 트럼프 당선인 측이 대규모 자유무역체제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폐기를 추진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보란듯이 미국의 뒷마당에서 트럼프를 견제하는 행보를 벌인 셈이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달 20일 APEC 페루 정상회담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사진=신화통신]



◆왕양 "45% 관세매기면 보복할 것"

지난달 21일부터 3일동안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됐던 '제27차 미·중 상무연합위원회'에 참석했던 왕양(汪洋) 중국 국무원 부총리 역시 대담한 발언을 내놓으며 트럼프측을 자극했다. 그는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고 중국산 제품에 대해 45% 관세를 매기겠다는 공약을 트럼프 행정부가 현실화할 경우 보복에 나설 것”이라는 발언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왕 부총리는 "트럼프 차기 행정부가 경제적으로 중국에 어떤 정책을 펼지와 미·중 경제협력 관계의 전망에 대해 모두가 관심을 보이지만, 그건 미국 대선 결과를 예측하기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기업이익이 미·중 간 경제관계를 보호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중국의 강성 지도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이 미국의 심장부에서 트럼프를 꼬집은 것이다.

◆트럼프 대만카드 꺼내며 기습저격

중국의 파상공세에 침묵하던 트럼프는 지난 2일 초강수를 두며 중국에 ‘선전포고’했다. 트럼프가 지난 2일(현지시간)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과 통화한 것. 10분가량 이어진 통화에 대해 트럼프측은 "양측이 긴밀한 경제, 정치, 안보적 관계에 대해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는 별도로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대만 총통이 오늘 나에게 전화를 걸어 대선 승리를 축하했다"며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미국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인이 대만 총통과 통화를 한 것은 지난 1979년 양국의 수교가 끊어진 이후 3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이 내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해왔으며, 중국의 입장을 고려해 이 원칙을 최대한 지켜왔다. 이를 두고 FT는 트럼프가 취임도 하기 전에 중국과의 대형 외교 분쟁을 촉발했다고 평가했다. BBC 방송 역시 트럼프 당선인이 대만 총통과 직접 통화를 함으로써 미국의 정책 기조를 깼다고 논평했다.

논란이 일자 트럼프는 "미국은 대만에 수십억 달러어치의 군사 장비는 팔면서 나는 축하 전화도 받지 말라는 것이 참 흥미롭다"고 비꼬면서 향후 무기판매확대 등 대만과의 관계심화를 시사했다. 트럼프가 시 주석에게 스트레이트를 날린 셈이다.
 

트럼프는 맹렬한 기세로 단숨에 힐러리를 꺾고 트럼프에 당선됐다. 외신들은 TV토론의 트럼프를 '어슬렁거리는 사자'로 표현했다.[사진=신화통신]


◆중국 즉각적인 거센 반발과 불만표시

트럼프의 기습적인 도발에 중국 정부는 곧바로 강한 반발성명을 냈다. 중국 외교부는 3일 겅솽(耿爽) 대변인 명의로 게재한 '기자와의 문답' 형식의 성명에서 트럼프 당선인과 차이 총통 간의 전화통화에 대해 "이미 미국의 유관방면(당국)에 엄중한 항의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그는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대만은 중국 영토의 불가분 일부분"이라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란 점은 국제사회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라고 강변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도 2일 "대만 측이 일으킨 '장난질'로 국제사회에 이미 형성돼 있는 '하나의 중국'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에게 그만큼 민감한 문제다. 대만이 미국의 지원을 얻고 공개적으로 대만독립운동을 해나간다면,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역사의 죄인’이 된다. 또한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와 차이 총통의 통화는 시 주석의 체면이 몹시 손상된 일이기도 하다. 트럼프로서는 중국의 '가장 아픈 곳'에 강펀치를 날리는 대담함을 보였다.

◆초강수에 양국관계 최악으로 치닫나

트럼프는 대만카드를 앞세운 기습으로 시 주석과의 ‘밀당’에서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향후 중국 역시 강도높은 반격에 나설것이 분명하다. 중국역시 미국의 약점을 많이 쥐고 있다. 우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발목을 잡을 것이 예상된다. 이로 인해 대북제재안 도출과정이 더욱 험난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 밖에 중국은 필리핀과의 관계를 강화해 미국을 견제할 수도 있다. 남중국해에서 진행중인 인공섬 건설에 박차를 가해 역내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중국에 진출해 있는 미국 기업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수 있다.

미국 역시 중국의 또다른 약점인 달라이 라마와의 면담을 추진하거나 일본 사드배치를 앞당기는 등의 중국견제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미중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푸단(復旦)대학 국제문제연구원의 선딩리(沈丁立) 부원장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취임 후에도 그런 접촉이 계속된다면 중국은 외교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베이징(北京)대의 왕동(王東) 교수도 "이번 전화통화는 중국의 잠을 깨우는 통화였다"면서 "6개월 또는 1년의 험난한 미·중관계를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갈등 최고조에서 '빅딜' 모색할 것

시 주석의 국정이념은 실사구시다. 실제 상황을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이 말은 철저한 실용주의에 맞닿아 있다. 마오쩌둥의 실사구시는 과거 국민당에 절대적 약세이던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게 만든 중국식 실용주의의 상징이다. 트럼프 역시 철저한 실용주의자다. 그는 부동산사업으로 4조원대의 재산을 일군 경험이 있으며, '협상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밀당’을 통한 이익극대화에 능하다.

양측이 서로 기싸움을 하겠지만 결국은 실용주의 차원에서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가능성이 충분한 이유다. 때문에 트럼프 집권 초기에는두 지도자가 큰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갈등이 최고조되는 순간에 미중투자보호협정과 한반도문제, 동아시아 영토분쟁문제 등 난제를 대상으로 '빅딜'이 이뤄질 것이라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 2일 베이징에서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사진=신화통신]


◆겉으로 으르렁, 속으론 소통확대

실제 양측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소통의 창구는 더욱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측은 주중대사로 테리 브랜스테드(70) 아이오와 주지사를 내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블룸버그는 브랜스테드가 가장 유력한 주중대사 후보라고 보도했다. 브랜스테드는 시 주석이 1985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서기 자격으로 해당 지역 축산 대표단을 이끌고 아이오와주를 방문했을 때부터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유지해왔다.

또한 시 주석은 지난 2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초청해 극진히 대우했다. 앞서 키신저는 1일 왕치산(王岐山)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와도 회동했다. 왕 서기는 직무상 외국 귀빈을 잘 만나지 않기로 유명하다. 트럼프에 외교자문을 한 적이 있는 ‘친중국 외교전문가’ 키신저를 환대한 것은, 중국이 결정적인 순간 키신저를 소통의 창구로 활용할 가능성을 고려해서다. 중국 역시 이처럼 미래의 소통창구를 챙기고 있다. 2016년 12월, 이렇게 두 대국 지도자들의 빅매치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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