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국공원 원경[1]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불리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현 인천여상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공원인 동공원과 대비해 서공원이라 불렸으며, 광복이 되면서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6․25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을 맞아 맥아더 장군 동상의 제막식을 가지면서 자유공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각국공원에 남아 있는 다양한 근대 문화의 잔상은 당시 건립되었던 건물과 시설들에서 찾아진다.

각국공원[1]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계획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 회의를 통해 홍진(洪震), 이규갑(李奎甲) 등 한성임시정부의 20명에 달하는 각계의 대표들이 4월 23일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하려 했다. 여건상 각계의 대표가 다 모이지는 못했지만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일종의 ‘의회’의 역할을 한 중요한 회의로 평가되고 있다.
광복 이후 오세창의 발의로 해방기념탑 건립을 준비하기도 했고(1945.10), 6․25전쟁 후에 충혼탑을 제막하였으며(1953.6), 인천출신 전몰장병 5백5위의 합동위령제를 개최(1953.11) 하였던 공간이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학도의용군기념비, 철도 및 세관용지 표지석들은 이러한 시대적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제물포 개항(1883)과 청일(1894)·러일전쟁(1904), 그리고 인천상륙작전(1950)에 이르기까지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났던 많은 역사적 사건과 그 부침(浮沈)을 함께 한 각국공원은 최초의 근대 공원이자 시공간을 초월한 근현대사의 타임캡슐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