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서울대 명예교수) [사진=한국문학번역원 제공]
한국에서 회의를 해보면, 여느 나라와는 다른 몇 가지 특성이 눈에 띈다.
"그 교수는 부임 후 학교에 통 나타나지 않아 못마땅했는데, 다른 데로 가겠다고 추천서를 써달라지 뭡니까? 나쁘게 쓰면 안 데려갈 것 같고, 좋게 쓰자니 사실이 아니어서, 추천서에 'He is a hard man to find.'라고 썼지요." 그 표현에는 '이런 사람은 쉽게 찾기 어렵다'는 좋은 뜻과 '이 사람은 도무지 잘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부정적 뜻이 동시에 들어있기 때문에 교수들이 박장대소했다.
한국회의의 둘째 특성은 한 두 시간을 끌어도 결론이 안 나거나, 회의에서 논의한 것이 실천이 잘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외국인은 "한국은 회의 공화국이다. 도처에서 회의를 하는데, 실천되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을 'NATO'(No Action Talk Only) 국가라고 불렀다. 국내 기관들은 수많은 국제 세미나·워크숍을 열지만, 거기서 나온 제안이 실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례적인 행사에 그칠 뿐, 토론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특성은 참가자들의 태도가 부정적이라는 점이다. 누가 어떤 아이디어를 내면 첫 반응이 "그건 안 될 텐데요. 이런 문제가 있는데요."다. 그래서 외국 회의에서처럼 "그것 참 좋은 아이디어네요. 한 번 해봅시다."는 반응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기 쉽다.
'다른 사람은 틀렸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타자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되고 타인에게 행사하는 폭력과 횡포가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남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포용과 관용이다.
부정적 태도는 문학에서도 발견된다. 작가들 중에는 "펜으로 글을 써야 상상력이 생기지, 플라스틱 키보드 앞에서 무슨 상상력이 생기겠느냐"고 개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붓으로 글을 쓰던 서도·서예의 시대에는 펜으로 쓰는 것은 상상력이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또 일부 출판인들은 "전자책에는 영혼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고급 양피지를 사용하던 파피루스 시대에는 값싼 종이 책에는 영혼이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책이나 문학의 본질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이나 매체는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또 변할 수밖에 없다. 셰익스피어 작품도 르네상스 시대에는 천막에서 노동자들이 보던 대중연극이었고, 오늘날 값비싼 도자기도 조선시대에는 단지 술병일 뿐이었다.
작가들 중에는 "스마트폰과 영화 때문에 사람들이 문학을 읽지 않는다"며 영상·전자매체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영화개봉과 맞물리면 문학작품은 삽시간에 베스트 셀러가 되고, 스마트폰을 활용하면 문학은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바일 기기 등을 문학의 적으로 생각하는 소극적·부정적·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학의 위기를 부르짖는 대신, 영상·전자 매체와 제휴하고 손을 잡으면 문학은 살아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크게 융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변화는 문학의 지평 확대로 보아야지, 문학의 타락 또는 순수성의 상실이라고 보면 안된다. '순수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고, 지금은 사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문화가 뒤섞이는 하이브리드·퓨전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은 과학기술·환경생태학·생체윤리학, 심지어 경제학·경영학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 문학은 삶의 다양한 양태를 다루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번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번역을 '원작을 훼손하는 이차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번역도 원작만큼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좋은 번역은 원작을 새로운 토양에 맞게 꾸며서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말처럼, 번역이 없으면 한 나라의 작가는 국내용에 그칠 뿐, 국제사회에 알려질 수 없다. 또 포르투갈의 노벨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말처럼, 작가가 한 나라의 문학을 산출한다면 번역가는 그것을 세계문학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긍정적인 사고와 열린 태도, 신속한 행동과 실천, 그리고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유연함이다. 경직된 아집으로 대립해 적을 만들고 서로 비난하며 배척하는 것보다는 타자를 포용하며 동반자로서 같이 가는 것이 현명하기 때문이다. 그때야 비로소 한국문학의 진정한 글로벌화와 문화융성도 이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