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상륙부대 전적지 ‘낙섬’의 블루비치

2016-09-12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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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용현동 앞바다 사라진 섬, 병자호란, 6.25 전쟁 흔적 간직

아주경제 박흥서 기자 =지금은 매립되어 섬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지만‘낙섬’은 용현동 앞바다에 떠 있던 작은 섬이었다.

이 섬은 두 차례 국가의 안위와 관계된 사건이 있다.

인천상륙작전 때 상륙 부대가 들어온 지점(블루비치)이었으며, 그에 앞서 병자호란 때는 인천 의병들이 청나라군과 치열하게 맞섰던 현장이다.

낙섬 표지석 (블루비치)[1]


자유공원에 서있는 맥아더 장군은 정면을 보고 있지 않다. 몸은 앞으로 향해 있는데 얼굴은 살짝 왼쪽으로 돌아가 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월미도 방향이다. 인천상륙작전 때 유엔군이 상륙한 지점(그린비치)이다.

 만약 더 얼굴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는 바로 옆 상륙지점인 대한제분공장 쪽으로도 향했을 것이다.

그곳은 레드비치이다.

낙석 표지석(레드비치)[1]


나머지 한 곳을 더 보려면 고개를 많이 돌려야 한다. 용현동 쪽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륙은 인천의 남쪽 해안인 낙섬 부근(블루비치)에서도 이뤄졌다.

낙섬은 또 다른 전쟁의 현장이다.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1604년 용현동에서 태어난 이윤생은 의병을 모집하여 낙섬에 들어갔다.

강화도에서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에 맞섰다.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의병들과 함께 34세 나이에 전사했다.

그 소식을 접한 부인 강 씨는 곧 바다에 몸을 던졌다. 후에 철종은 정려를 내리고 그를 좌승지에, 강씨를 숙부인으로 봉했다.

정려(旌閭)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동네에 세운 건축물이다.

낙섬 정려[1]


현재 남구 독배로 404번길 34 (용현동)에 시도기념물 제4호인 이윤생·강씨(李允生姜氏)정려가 있다.

낙섬은 조선시대 때 ‘원도(猿島)’라 불렸다.

이곳은 서해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동해는 강릉, 남해는 순천에서 국가제사를 지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원도는 인천도호부 서쪽 12리 되는 곳에 있는데 제단이 있어 봄·가을로 산과 바다에 제사 지낸다’고 기록돼 있다.

매년 봄, 가을마다 지방 수령인 인천부사(현 인천시장)가 직접 나와 제사를 지냈다. 왕조의 안위와 백성의 안녕 그리고 풍농, 풍어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 상징적인 장소였다.

원도의 존재는 지도에도 명확히 나타나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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