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올림픽 화가 류칭리

2016-08-3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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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체육도>[사진= 류칭리 본인 제공]


인민화보 리후이펑(李慧鵬) 기자 = 류칭리(劉慶利), 1962년 베이징 출신. 자는 ‘쯔판(子凡)’이고 호는 ‘다판(大凡), 칭리산민(青籬山民)’. 중앙미술학원 중국화과와 중국예술연구원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2008년 제29회 올림픽 주경기장인 ‘냐오차오(鳥巢)’의 본부석 ‘국제 귀빈실’ 견본(絹本) 세밀화 벽화인 <중국 고대 체육도>를 제작했다. 같은 해 ‘노성문(老城門)’ 회화 작품이 문물출판사의 <2008 중국 문화 유산 연감>에 수록됐고 이 작품으로 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현재 베이징시 문련 라오서(老舍)연구회 이사이며 베이징시 종교국 기독교 청년회 상무이사 등을 맡고 있다.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인 냐오차오의 본부석 국제 귀빈실에는 <중국 고대 체육도> 벽화가 있다. 이는 화가 류칭리가 올림픽을 위해 특별히 창작한 작품으로 26폭에 높이 2.5m, 길이 28m의 세계에서 보기 드문 거대한 견본 세밀화다.

<중국 고대 체육도>는 중국 한나라에서 청나라 후기까지 천 여년 동안의 중국 고대 체육사를 담고 있다. 말타기, 스케이트, 바둑, 활쏘기, 소림 무술, 중국 태극권 등 12개 항목이 그려져 있다. 화폭에 담긴 인물들은 모두 살아 있는 듯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 배경으로 산을 선으로 심플하게 그려넣어 그림 전체가 통일감이 있으며, 각 화폭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화폭의 세부적인 부분과 작품 전체가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귀빈실의 현대적인 스타일과 잘 어울린다.
 

죽생황야(竹生荒野)[사진=류칭리 본인 제공]


‘예술’로 올림픽에 공헌

류칭리는 예술의 형태로 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당시 류칭리는 작품 모집 설명서를 보고 자신이 없었다. 전문가팀의 요구가 너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작품 내용은 체육과 관계가 있으면서 차분한 느낌이 들어야 한다, 높이가 낮은 귀빈실이 넓어 보이도록 해야 한다, 순수한 중국적 소재와 중국 회화를 사용하되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실내 인테리어와 잘 조화되도록 해야 한다, 중국의 전통과 현대적인 요소를 잘 결합해 우아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등의 요구였다. 서로 상반되는 개념의 요구가 너무 많아 누가 됐든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류칭리가 뽑혔는지, 그의 영감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 했다.

류칭리는 두 가지 예를 들었다. 하나는 모사 능력이다. 16살 때로 그는 반에서 모사 능력이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는 진노련(陳老蓮, AD 1599-1652)이 그린 ‘수호(水浒)’의 108 호걸 모사를 제일 잘했다. 문인화의 시조라고 불리는 진노련은 문인화 기교를 사용해 ‘수호’의 무장들에게 문인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또 한 예로 그림의 세부 사항을 모두 고증했다는 점이다. 그는 베이징시도서관과 중국국가도서관을 수없이 드나들며 자료를 찾았다. 바둑 그림의 경우 직사각형 표준 바둑판에 옛 기보대로 바둑돌을 놓았다. 귀빈실은 세계 각지의 손님을 모시는 곳이어서 만약 일본과 한국의 전문가가 와서 기보가 잘못된 것을 본다면 웃음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류칭리의 기본기와 세부 사항에 대한 집착에 전문가팀은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정말 그들을 감동시킨 것은 류칭리가 융합 화법(畫法)으로 그들이 요구한 부분을 정확하게 구현했다는 점이다.
 

베이징 노성문 시리즈- 베이징 노성문 시리즈는 류칭리가 7년 동안 수많은 자료를 연구한 다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경험에 따라 제작한 시리즈 그림으로 베이징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면서 고 건축 보호를 호소한 작품이다.[사진=류칭리 본인 제공]


융합 화법의 대가

류칭리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두 살때부터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류칭리의 아버지인 류스랑(劉世讓)은 중앙미술학원 판화과를 졸업하고 허우이민(侯一民, 유명 화가, 제3, 4차 위안화 디자인에 참여했다)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류스랑은 판에 박힌듯이 아들을 가르치지 않고 아무렇게나 그리라고 내버려두었다. 자신이 어린이들에게 회화를 가르치고 나서야 류칭리는 마침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버지의 방식이 아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아이가 정말 흥미를 보여야 정규 교육에 들어갈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거친 류칭리는 1978년 당대 화조(花鳥) 세밀화의 대가인 궁원전(龔文桢)의 문하로 들어가 공예미술 디자인을 공부했다. 중앙미술학원에 입학 뒤에는 중국화를 배웠고 졸업 후 중국예술연구원 대학원에서 문인화를 공부했다.

류칭리는 예술을 사랑한다. 그는 중국화의 화조를 잘 그리고 인물에도 애정이 깊으며 산수(山水)에도 감정을 쏟는다. 그는 또한 조소, 현대 예술, 공예 미술 디자인, 벽화 디자인, 실내 디자인 등에 적극 나서기도 한다. 그는 예술과 관계된 일이라면 뭐든지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류칭리의 회화 작품 가운데 서양의 수채화 같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중국 세밀화 기법으로 그린 것이 있다. <계관화(雞冠花)> <수선(水仙)> 등 작품이 그렇다. 후퉁(胡同) 시리즈는 사실화이지만 다른 회화 재료를 섞었다. 어떤 작품은 멀리서 보면 추상화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하나하나 구체적인 그림이 있다. <천단(天壇)> <원림일기(園林日記)>는 멀리서 보면 추상화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림 속에 고건축, 자동차, 교통 표지판, 횡단보도 선 등이 있다. 류칭리는 이런 그림을 통해 현대 기술과 인위적 요소가 너무 많아 고건축을 침범하는 것에 대한 걱정과 불편함을 표현했다.

다양한 예술 경험이 류칭리의 회화 스타일을 형성했다. 동양과 서양의 융합, 흑백과 컬러의 융합, 전통과 현대의 융합 등이 그것이다. 이런 융합이 있었기 때문에 류칭리는 베이징올림픽에 공헌할 수 있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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