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
유리하다고 보이면 나아가고 불리하다고 생각되거든 물러서라(見可以進, 知難而退)
-오자(吳子)
고구려놈 쯤이야, 한낱 주머니 속 물건일 뿐이라고 큰소리치더니
검은 꽃(눈동자)이 흰깃(화살)에 박혀 외눈박이 될 줄이야
당태종을 말함(貞觀吟) -목은 이색(1328~1396)
◆베스트황제 vs 워스트황제
평생 전쟁에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던 당 태종은 645년 9월 고구려 안시성 전투에서 첫 패전의 치욕을 맛보았다. 게다가 그는 양만춘 장군의 화살을 맞아 애꾸가 됐다(정사에는 기록 무). 장안으로 돌아온 당 태종은 전혀 다른 황제가 되었다.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는 명재상 방현령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깊이 성찰하며 4년 동안 조용히 내정을 보살피다가 649년 5월에 죽었다.
중국 역사상 모두 245명의 황제가 군림했다. 사람들은 그중에서 최고의 명군은 당 태종을, 최악의 폭군은 수 양제를 꼽는다. 당 태종이 베스트황제로 숭앙받는 이유는 과거제와 부병제, 주현제 등 당률을 확립했기 때문이고 수 양제가 워스트황제로 남게 된 이유는 대운하 공사 등 자기과시용 토목공사로 재정을 탕진하고 백성을 수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보자,
만일 당 태종이 설욕한답시고 계속 고구려를 침략하는 패망의 지름길, ‘열고’를 택했더라면? 만일 수 양제가 1차 고구려원정에 실패한 후 과오를 반성하고 민생을 보살피는 길로 유턴하였다면?
아마 중국 역사상 베스트황제와 워스트황제가 뒤바꾸어졌을 수도 모를 일이리라.
정치 지도자들은 왕왕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시치미를 뚝 떼며 모르는 체하거나 도리어 고자세로 군림하여 계속 정면돌파라는 이름으로 추켜세워지며 나아가려고 한다. 왕도 대통령도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과오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과오를 플러스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솔직하게 과오를 시인하고 유턴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다음, 얼버무려서 속이려고 한다면 왜 나쁜 것일까? 왜 이런 실수를 했는지 그 원인을 구명하려는 자세가 없으므로 두 번 세 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가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라면 국가는 쇠망하게 되고 사회는 타락하고 국민은 불행해지게 될 것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3일 사드 보복을 공식화했다. 사드 배치가 강행된다면 중국과 러시아는 한·미가 감당 불가능한 대응 카드를 꺼낼 것이고, 만약 충돌이 발생하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군사대치에 끼어든 한국이 가장 먼저 공격 목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한류스타들의 중국내 행사를 봉쇄하였다. 주한 중국대사관은 한국인에 대한 상용복수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조처를 취한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은 지금 사드배치를 남중국해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전략적 핵심이익의 심각한 훼손으로 보고 있다. 사드 배치 문제는 중국 심장부와 멀리 떨어져 있으며 자국이 현재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남중국해 문제와는 비교할 바 아닌, 핵심중의 핵심문제이며 용납 못할 중대사안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사드보복 생각지도 않고 있다.” “저들도 손해를 보기에 보복할레야 할 수 없을 걸.” “중국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나라라 사드보복 하기 어렵다.” 라고 말한 주중 한국대사, 경제부총리 등을 비롯한 여러 고관ㅠ대작들의 민망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인가?
관을 보고도 자기가 이미 죽은 지 모르는 새내기 혼령인가? 국내 일부 언론은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중국이 상징적 수준을 넘어 높은 수준의 보복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고 예상한다는, 너도 속고 나도 속는, 하지만 그는 속지 않는 보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위안성 자기기만성 보도의 행간 사이로 아픈 역사의 반복성의 체 바퀴 소리가 난다. 임진왜란 직전 왜군이 침략할리 없다고 잘못 보고한 김성일은 전사하였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 김성일은 국가의 운명보다는 당파의 이익에만 치중한 천추만대의 죄인으로 남아있다.
◆루비콘 강 vs 위화도회군
경남대 박후건 교수는 사드 배치를 박근혜 정부의 불가역적 결정을 너무 쉽게 했다고 비판했다. 더이상 한국 외교에서 새로운 외교전략이 나올 수 없다고 판단하다며 한국 외교는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아직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 원래 이 구절은 카이사르가 이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를 제압한 데서 중대한 결의로 일을 새롭게 시작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드 배치가 북진통일이라도 하기 위한 출정식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사드 배치가 진취적이고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결단에서 비롯된 일인가,
사드 배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드 배치는 이리 보아도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은 많고(得小失大), 저리보아도 길함은 적고 흉함은 많고(吉少凶多), 가까이 보아도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한 것이고(捨大取小), 멀리 보아도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 것(小貪大失)이다.
사드를 배치한다고 북한의 도발이 근절될 것인가. 그렇지 않지 않다. 나아가기란 그래도 쉬운 편이다. 어려운 일은 오히려 뒤로 물러서는 일이다. 사드 배치는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드 배치는 루비콘 강이 아니라 위화도 회군이어야 한다.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태조가 될 수 있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침략이 때가 아님을 깨닫고 침략을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스트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필자는 아직도 박근혜 대통령이 후세역사에 천년 신라왕국을 망하게 한 진성여왕이 아니라 남북평화 민주통일의 초석을 닦은 21세기 선덕여왕으로 기록되기를 바라고 있다. 필자는 여전히 그러한 바람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았다.
◆사드배치에 관한 우려들이 기우이기를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필자는 좌우 구분 혐오파다. 냉전시대도 끝난 지 어언 25년, 세계가 좌우로 흔들리던 방향 논쟁의 우마차 길을 벗어난 지가 도대체 언제인데, 왜 우리만 ‘관념의 유희’와 ‘진영 논리의 질곡’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무슨 권투중계도 아니고, '그 놈의 레프트 훅, 라이트 훅' 다툼이 이제는 식상할 때도 됐는데, 진저리나기는커녕 ‘좌우대립 중독증’에 걸렸나. 해방이후 지금껏 우리는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다르면 무조건 적이라고 적대시, 사갈시해왔다. 좌우 이념에 대한 명확한 인식조차 없이, 편 가르기 색깔 논쟁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러왔다. 어쩌면 본질은 같으나 이름만 다른 관념용어 하나를 위하여.
그래도 누가 좌, 우 둘 중에 하나를 택일해야만 한다고 채근한다면, 우파가 ‘국가주의자’이고 좌파가 ’세계주의자‘라고 일도양단한다면, 필자는 단연 전자 편에 서겠다. 더 나아가 예사 국가주의자가 아닌 ’국가이익 지상주의자’ 임을 방방곡곡에 커밍아웃하겠다.
‘극우파’, ‘국수주의자’ 라고 비난해도 좋다. 우리나라에도 '네오나치'나 일본극우 흉내를 내는 그런 '짝퉁 극우파' 말고 '진짜 극우파' 하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애국애족주의자’, ‘대한민국 국익지상주의자’ 진짜 극우파라면 필자는 선착순으로 득달같이 달려가겠다.
그런데 문제는 '아주경제' 7월 12일자에 기고한 '사드배치가 역사상 세 번째 ‘잘못된 선택’이 아니길‘의 칼럼을 공유한 한 블로그, 그리고 한 일간지에 실린 필자의 사드관련 인터뷰 기사에 대한 몇 개의 댓글이다.
누리꾼들은 필자를 ‘친중파’, ‘병자호란때 주화파’,‘비굴한 겁쟁이‘ , 심지어 ‘중국의 보복을 바라는 놈’ , ‘종북 좌빨’, ‘반일주의자'(필자는 반일주의자가 아니지만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반일하면 큰일나는 나라가 되었나?)라는 댓글을 달았다. 평소 소통을 중시해 기사만큼 댓글도 소중히 여기는 필자에게는 도저히 웃어넘기기 어려운, 참으로 고약한 악성댓글이다.
일단 필자가 쓴 18권의 저술과 30여편의 논문과 150여편의 칼럼 중 아무거나 골라 훑어보길 바란다. 중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비롯해 삼라만상, 우수마발에 관한 것이지만 대부분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 국익의 극대화하기 위한 객관적 인식과 구체적 대안을 고민한 흔적들이라고 자부한다.
특히 2012년 펴낸 단행본 '중국의 습격'은 갈수록 노골화하는 중국의 해양팽창 야욕에 대처하기 위해 제주 해군기지 건설의 당위성과 시급성을 호소하기 위해 쓴 것이다. 여러 칼럼과 논문, 인터뷰에서도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야당 대통령 후보와 일부 정치인의 실명까지 거명하며 신랄하게 비판해왔다.(1)*
해양영토 수호의 최전선에 선 '문협'(文俠, 칼대신 필을 쥔 협객)을 자처하면서 필자는 우리 해역을 침범한 중국 불법 조업어선은 격침시키고, 공무집행 중인 우리 해경을 살해한 중국인 선장은 사형에 처해버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도의 중국 측 기점도 바로 잡아 기존의 중간선보다 21㎞나 더 우리 바다를 확대시켜 이어도의 관할권 확보는 물론 한국에 더욱 유리하게 광대한 해역(2만~3만㎢ 해양) 확보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데 기여했다.(2)*
또 중국과 일본이 영유권 분쟁 중인 '조어도(釣漁島)'를 중국 명칭 ‘댜오위다오’가 아닌, 일본 명칭 ‘센카쿠’로 불렀다. 일본 편이냐 중국 편이냐가 아니다. 센카쿠로 불러야만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권 논거의 일관성 확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국제법상으로 점유의 의사를 갖고 먼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그 땅의 영유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첨언하건데 필자는 해군발전자문위원(2012년~)으로 국군의 날 행사나 장교 합동 임관식 행사마다 계룡대 단상에 임석해 대통령의 연설에 열렬한 박수를 쳐 왔다.
이토록 국가이익 지상주의자로, 문협을 자처하며 살아온 필자인데 왜 이번 사드배치에 대해서 걱정하고 난색을 표할까. 묵살해버리지 말고 한번 쯤 귀 기울여보기를 바란다.
푸젠성 미사일 예비사단의 제1정위(사단장보다 높음)를 7년이나 역임했던 시진핑 중앙군사위 주석의 독특한 군 경력을 봐도, 설상가상으로 작금의 국내 정세와 동북아를 비롯한 국제 정세가 돌아가는 상황을 두루 살펴봤을 때, 사드배치가 과거 '마늘 파동' 정도의 레벨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어떡하나. 북한고립이 아니라 우리만 고립되면 어떻게 하나. 사드배치가 종착점이 아니라 안보불안과 경제침체의 출발점이 될까 걱정이 태산이다.
아무튼 훗날, ‘걱정도 팔자였구나’ 사드배치에 대한 우려들이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면 참 좋겠다.
중국의 적극적인 제재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사드 배치를 오픈카드가 아닌 전략적 히든카드로 활용했어야 했다, 오픈카드, 이 용어가 낯이 익다. 졸저들을 살펴보았다. 그랬다. 역시 그 놈의 ‘오픈카드’ 때문에.......,
남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하지만 남을 알기는 쉬우나 자신을 알기는 어렵다. 자신의 눈만으로는 객관적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즉 타인의 눈을 자신의 장단점과 여러가지 취약한 곳을 객관적으로 비추어 볼 수 있게 하는 거울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누구이고 그들이 보는 한국인은 또 누구인가라는 식의 질문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불가분의 관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핵심테마이다.
이에 졸저들 중에서 ‘중국인이 본 한국인’ 과 ‘한국인이 본 중국인’ 글들 중 사드 배치 문제와 다소 관련있는 것들을 발췌해본다.
◆중국인이 보는 한국인: 조급성, 오픈카드를 즐겨 쓰다 제풀에 겨워 억장이 무너진다.
협상에서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훨씬 호쾌하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비교적 빨리 내놓는 편이다. 히든카드보다는 오픈카드를 즐겨 쓴다. 상대방에게 공개한 카드로 상대방을 어떻게 해서든 설득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인은 장유유서와 상명하복 등 수직적 서열관념이 유난히 강하다. 존대 말이 거의 없고 부모앞에서 맞담배질을 하는 중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연장자와 상급자의 천국이라 불러도 좋을 대단한 서열사회다. 좀 친해졌다고 해서 한국인을 중국에서처럼 어깨를 툭툭치며 '펑유(朋友;친구)'라고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친구의 개념은 관계도 친할 뿐만 아니라 나이도, 계급도 같아야 비로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한국인의 성뒤에는 직책을 붙여 김 부장님, 박 사장님 식으로 불러야 안전하다.
음주가무에 능한 한국인은 우리 중국인에 비해 외향적이며 다혈질이다. 한국인 중에는 고독을 좋아하고 속내를 비치지 않는 이른바 크렘린 형은 드물다. 그들은 대화하고 같이 어울리고 일함으로써 에너지를 충전한다.
한국인은 라틴계 사람처럼 쉽게 흥분하고 쉽게 화를 잘 내는 편이다. 화가 나면 무서운 게 없는 기질이다. 온몸의 활력이 금방이라도 피부를 뚫고 터져 나올 듯한 그들은 한번 열을 받으면 그 누구도 못 말린다.
한국인과의 거래시에는 두루뭉수리 애매모호한 화법보다는 솔직하고 직선적 의사 표시가 바람직하다. 그들에게는 히든카드기법보다 먼저 이쪽의 카드를 노출시킴으로써 성의있는 협력을 유도하는 오픈카드 기법의 구사가 호소력이 크다고 하겠다. 우리 중국인과 달리 희로애락이 얼굴표정이나 태도에서 쉽게 드러나는 한국인을 면밀히 관찰하면 그들의 진정한 의도가 무언가를 확실히 파악해야 한다.
한국인은 오늘 협상하면 내일 계약하고 모레는 개업하려든다. 그들은 마치 처음 만나는 상대와 거래가 꼭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당혹스럽지만 빨리 성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조급성을 잘 알고 대처하면 그들처럼 손쉬운 외국인은 없을 것이다.
한국인은 '만만디(慢慢地)' 중국인을 답답하게 여기는 반면 중국인은 '빨리빨리' 한국인에 얼이 빠진다. 한국인은 세밀하고 차분한 시장조사와 사업 타당성 심사과정은 생략한 채 우선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경향이 있다. 조급성은 본래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사업도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것처럼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중국에서 한국인은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 성사된 일은 적다. 두 사람은 비록 동일한 사물과 동일한 사업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인식과 착수와 달성의 과정에서 느끼는 속도감은 판이하게 다르다.
따라서 한국인과의 거래나 협상시 중국인은 그들의 조급성을 모르는 체 하는 게 상수다. 지연 작전을 쓰고 시간을 질질 끌고 가라, 성격 급한 그들은 분통이 터지고 제풀에 겨워 억장이 무너지고 드디어는 백기를 들고 말 것이다.
◆한국인이 보는 중국인 : 투쟁성, 복수의 칼을 가슴에 품고 산다.
중국문화의 전반에 깔린 가장 뚜렷한 특징은 겉과 속, 언어와 행동, 진실과 거짓 등 서로 상반된 요소들이 모순대립하고 있으며, 이들 양면성이 ‘중용’과 ‘조화’라는 모호한 방식으로 표출하는데 있다. 이 점에 착안해 자존심과 교만성, 정의에 대한 무관심과 이익에 대한 몰입성, 인내성과 굴종성, 평화성과 투쟁성, 포용성과 지체성 등 총 다섯 쌍의 중국 국민성을 도출해 불 수 있다.
이중 중국인의 ‘투쟁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중국인들과의 협상에서 성공하는 무기는 별다른 게 없다. 불같은 열정도 화끈한 호기도 소용 없다. 자제력을 잃어 길길이 날뛰거나, 발끈 화를 내 제풀에 꺾여도, 억장이 무너져서도 절대 안된다. 중국인의 인내력보다 좀더 오래 참는 ‘초중국인적 인내력’과 좀더 집요하게 버티는 ‘차가운 용기’라는 무기로 맞서나가는 길뿐이다.
중국말에는 우리말에 있는 '말 속에 뼈가 있다' 라는 뜻의 언중유골이 없다. 그 대신 '웃음 속에 비수가 숨어 있다'라는 '소중장도(笑中藏刀)'가 있다.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중국인은 저마다 가슴 속에 칼 한 자루를 품고 산다.
사물의 본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환경에서는 잠시 동안 억압돼 있지만 적당한 환경이 주어지면 다시 폭발한다. 공자의 표정과 노자의 웃음만 흘리는 온화하고 느긋한 중국인도 많지만, 그 웃음의 행간에는 비수가 어른거리고 피내음을 풍기는 중국인도 부지기수다. 도척보다 난폭 잔학하고 예의범절에 구애받지 않는 중국인의 수도 만만치 않다. 협객 반, 건달 반의 중국인들은 탁자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노래부르기도 하고, 눈을 부릅뜨고 술을 벌컥벌컥 마시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잘 때리기도 하며 욕도 잘한다. 그들의 감정은 일단 폭발할 때 그 위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반만년 중국사의 뒤안길은 중상과 모략, 암투와 음해의 벌판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황실의 어전회의부터 시골의 촌로회의까지 중국의 모든 집회 석상에는 입으로는 ‘황은이 망극하여이다’가, 가슴속으로는 “네놈에게 뜨거운 맛 좀 보여주마” 가 쌓여있다. 복잡미묘한 배후와 배후가 서로 얽혀들고 모반은 거듭되어 끝없는 내부투쟁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던 사례는 바닷가 백사상의 모래알보다 많다.
중국인이 잘 하는 말 중에 “10년 내에만 복수하면 사나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속을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어떤 분한 일을 당했을 때 잘 잊어버리지 않는 것도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인들은 오랜 옛날부터 청부살인의 방식으로 원수를 갚아왔다. 복수할 때면 자신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친구나 권력, 금력을 빌려 원수를 처단했다.
불쾌한 일을 당해도 화를 내지 않고 웃는 중국인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몇 년, 몇 십년 후, 아니 대를 이어서라도 복수의 칼을 가슴에 품었다가 상대방이 그 일을 완전히 잊었거나 반격의 힘을 잃었다고 판단되는 어느 날 뽑아드는 것이다.
은혜와 원수가 분명함, 중국인은 원수를 은혜로 갚거나, 은혜를 원수로 갚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행동원리로 삼아왔다.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은혜로 갚고, 원수를 지면 반드시 복수로 갚는 것,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 이것이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은원(恩怨) 이데올로기이자 최고의 행동원리이다.
--------------------------------------------
[주석]
(1)* '조선일보' 2012년 3월 26일자 A36면 전면 강효백 교수 인터뷰, “중국, 이어도 뺏으려고 무력점령 준비중”, [최보식이 만난 사람]
(2)*2009년 3월 14일 국토해양부 산하 국립해양조사원은 강효백 교수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여 이어도 중국 측 기점을 기존 ‘퉁다오’보다 42㎞ 더 떨어진 ‘서산다오’로 변경했다. 외교부는 이를 근거로 해외 공관의 지도에 이어도 기점을 변경했다. '국민일보' 2009년 4월 14일자 2면 기사 참조,
[참고문헌]
강효백, '중국의 슈퍼리치', 한길사,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