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49년 4월의 제3회 정기총회는 목당(牧堂) 이활(李活)을 다시 3대 회장으로 선임하였으며, 부회장인 김익균(金益均)과 박병교(朴炳敎)도 유임시켰으며 다만 상무이사 4명을 더 늘렸는데 신임으로 김재원(金在元)·이광화(李光華)와 김창화(金昌華)·정규성(丁奎成)이 선임되었다.
무역협회는 회장단의 유임으로 순탄한 운영이 약속되었다. 한편 행정부 쪽은 정부 수립 후 상공부의 상역국장(商易局長)에 박충훈(朴忠勳)이 취임하였고 재무부장관에는 앞서 말한 대로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 차관엔 장희창(張熙昌)이 취임함으로써 협회에 관한 상의를 격의 없이 할 수 있었다.
협회의 제3회 정기총회를 준비하고 있던 4월 초에는 중공군이 양쯔강 이남을 모두 장악하였고 24일엔 이미 난징(南京)에 진입하였다. 대륙에서 이렇게 사태가 급변하고 있는 마당에 4월 18일 미국무성 대변인은 주한미군을 수개월 내에 철수한다고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북한은 해방 당초부터 소련의 무기 제공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탱크와 비행기까지 갖춘 수십만의 현대식 군대를 갖추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고작 미제 소총에다 심지어 일본이 버리고 간 구식 소총까지도 쓰고 있는 빈약한 군대 몇 만 명이 있을 뿐이었고 징병제(徵兵制)조차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정황 속에 남한 자체 내에서, 더구나 국회 안에서 미군 철수를 외친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세가 이렇게 되니 이제까지 공론(空論)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남북협상론(南北協商論)도 현실감을 띠게 되고, 위기의식은 날로 고조되어 갔다.
이른바 소장파(小壯派)라는 사람들의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뒤에는 공산당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목당도 짐작했는데, 뒤에 경찰이 밝힌 것을 보면 남로당(南勞黨) 지령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 그의 짐작은 들어맞은 것이었다. 이런 북새통 속에 6월 26일 김구(金九)가 현역장교에게 암살당하였다. 6월 29일에는 미군이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남한에서 철수를 완료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국부(國府, 중국 국민당이 1925년 광저우에 수립한 중화민국 정부인 ‘국민 정부’을 줄여 이르는 말)의 전철을 밟을 위험성이 너무나 컸다.
목당은 사태가 이렇게 기울여져 가는 것을 볼수록 민족진영의 갈등이 한심스러웠다. 이런 판국에 정부와 국회가 개헌 문제를 놓고 정면대결의 파국으로 치달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