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45]시간 걸려도 토론으로 이해 구해

2016-07-18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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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45)

제3장 재계활동 - (40) 민주주의적 운영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48년은 한국무역협회로서는 다난했지만 나름대로 보람있는 한 해였다.

연초에 대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회원들의 공동 수출 사업이 실현되어 사업에 참여한 회원 상사들의 적극적인 현지 진출이 있었고 이것이 바탕이 되어 화신무역(和信貿易)과 동아상사(東亞商事)의 무역선(貿易船)이 홍콩으로 나가게 된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조선우선(朝鮮郵船)이 이에 발맞추어 대외항로(對外航路)에 취항할 수 있었던 것도 큰 보람이었고, 이와 같은 일부 무역업자들의 무역 개척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내 시장가격 조사와 수출지인 홍콩 현지의 물가 조사에 전력하였다.

한편 대일무역의 통로도 열기 위해 회원 상사로 조직된 대일 수출입조합(對日 輸出入組合, 가칭)의 결성을 서둘렀다. 그간 협회는 기회 있을 때마다 대일 무역의 실현을 촉구해 왔으나 실현이 안 되고 있었는데, 1949년에 들어와 천우사(天友社)와 동아상사가 정부 대행으로 대일 가마니 수출을 시작함으로써 처음으로 길이 트였던 것이다.

미군정 때는 군정청(軍政廳)과 맥아더 사령부 사이의 교섭으로 고령토와 소금, 해태와 멸치 등속을 일본에 수출하고 석탄을 수입해다 쓰는 등의 거래가 이루어져 왔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부 무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대행이라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민간업자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었다. 즉 군정 말기인 이때에 일본에 발주한 비료를 도입케 되면서 포장용 포대가 없으니 가마니를 급송하라는 미극동사령부의 요청이 날아들어 천우사와 동아상사가 이를 대행하게 된 것이다.

수출량은 가마니 500만 장이었고 일본 제일물산(第一物産)과의 구상무역(求償貿易, 대금결제 시 화폐가 사용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이용되는 경우를 총칭하는 것. 바터무역)이며 대상 수입물자는 생고무와 신문용지 및 카바이트 등이었다. 마침 가마니는 정부 수립 전에 군정 당국끼리 수출키로 결정을 모아 농업금융조합(農業金融組合, 현 농협)에 수집되어 있던 재고가 있었다.

이리하여 무역업자로선 최초의 전택보(全澤珤)가 정식 여권을 발급받아 일본에 입국했으며, 이를 계기로 해태와 멸치 등속의 수산물 대일 수출이 이루어져 일본을 왕래하는 업자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1950년 1월에 가서는 대한물산(大韓物産), 동아상사, 천우사 등이 일본에 지점을 개설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아무튼 1948년은 상관무역(商館貿易, 어떤 나라가 자기 나라의 개항장에 머물러 있는 상인을 통해 다른 나라와 거래하는 형태의 전근대적인 무역. 거류지 무역)에서 자주무역(自主貿易)으로 전환하는 데 협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에 따라 협회에 대한 정부나 업체의 인식도 높아졌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협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정계와는 인연이 멀어졌다.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가 타계(他界) 사람이 되고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한민당 당수로서 정치에 바쁘다 보니 목당과의 접근은 자연 멀어졌다. 목당은 스스로 예전에 친했던 정계 인물들과 만날 의욕도 없었고 협회 일도 바쁘고 보니 그의 나날은 협회에 관한 일이 전부였다.

그러는 가운데 1948년 10월 여순(麗順)반란사건이 있었고 한민당은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개편되었으며 김약수(金若水) 등 국회 프락치사건이 일어나는 등 위기의식이 감돌고 있었으나, 목당은 이제 그런 세계와는 딴 세상 사람이었다. 오로지 재계인(財界人)으로서의 신념을 굳히고 협회 운영에만 몰두하였던 것이다.

건국과 함께 목당은 한국무역협회라는 경제단체의 장으로 한국 무역사를 여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하의 경제단체는 민주주의적 운영(運營)이 뿌리내릴 적에 이 나라 경제와 함께 발전을 약속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발전도 여기서 시작된다고 목당은 굳게 믿었다.

목당의 회의 진행방식은 한결 같았다. 이사들 간에 이론(異論)이 팽배할 때에도 충분한 토의를 갖게 하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납득이 가도록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지리한 의사 진행방식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이해관계가 얽힌 경제단체 회의에선 이상적인 운영방식이었고, 목당은 이를 원칙으로 삼았다. 그가 무역협회 만년 회장으로 재임을 거듭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데 연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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