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장자이야기
나비에서 꿩으로
무얼 모르는지를 알라
‘왼쪽’이라고 말하면 이는 곧 ‘오른 쪽’이 있음을 전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래 분별이 없는 道를 말로 표현하면 분별이 생겨납니다.
좌라고 말하면 우가 있게 되고[좌우(左右)], 정상적 윤서(倫序)를 말하면 임시변통이 있게 되고[윤의(倫義)], 전체를 나눠본다면 부분에 대한 변론이 있게 되고[분변(分辯)], 비슷한 상대와 겨루는 ‘경(競)’이라고 말하면 집단으로 다투는 ‘쟁(爭)’이 있게 됩니다[경쟁(競爭)]. 이렇게 분별되어 나타나는 8가지 속성을 ‘팔덕(八德)’이라 합니다.
성인(聖人)은 육합(六合: 상하와 4방) 밖의 초월적 존재[道]에 관해서, 그저 관찰하고 있을 뿐 분별해서 말하지 않고; 육합 안의 사물에 관해서는 논의는 하되 논증하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선왕들의 치적에 관해서는 논증은 하지만 변론하려고 하지 않지요. 성인은 道를 마음속에 품고 모두의 해화(諧和)을 위해 말하는데, 보통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서로를 부정하고 파벌을 이루며 말을 합니다.
그래서
『대도(大道: 聖)는 무어라 부를 이름이 없고<대도불칭(大道不稱)>
대변(大辯: 知)은 말로 나타내지 않으며<대변불언(大辯不言)>,
대인(大仁: 仁)은 스스로 仁하다고 과시하지 않고<대인불인(大仁不仁)>,
대용(大勇: 義)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대용불기(大勇不忮)>,
대렴(大廉: 禮)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대렴불겸(大廉不嗛)>.』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道[聖]’는 인간의 언어 영역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절대적인 ‘하나’이므로, 이를 훤히 나타내서 말한다면, 그건 이미 道가 아닙니다. 道를 깨달아 안다는 ‘知’는 말로써 변론하려고 하면 오히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仁’은 스스로 나타내려고 하면 두루 펼쳐 발전하지 못하고, ‘勇[義]’은 남을 해치려는 뜻이 들어있으면 본뜻을 잃어버리게 되고, ‘禮’는 드러나게 겸손해지려고 하면 오히려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이 다섯 가지 德의 속성, 즉 오행(五行)은 본래 원만하여 서로 친밀한 것인데, 자칫하면 모가 나서 불화(不和)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무얼 모르고 있는지를 알고, 거기에서 멈출 줄을 알면 경지에 오른 것입니다<지지기소부지 지의(知止其所不知, 至矣)>. 누가 말로써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道의 참 뜻을 알 수 있을까요? 만일 이런 도리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심령은 보고(寶庫)입니다. 이 보고에는 아무리 많은 지식을 부어도 차지 않고, 아무리 많은 지식을 퍼내도 마르지 않습니다. 이런 경지를 일컬어 ‘보광(葆光 은밀한 지혜의 빛)’이라고 부릅니다.
옛날에 요임금이 미개한 세 나라를 치려고 순(舜)에게 물으니, 순이 대답했습니다. “세 나라를 힘으로 정복하려고 하지 말고, 공덕(功德)을 쌓아 보광(葆光)으로 동화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