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손끝의 미, ‘우시 정미수(精微繡)’

2016-05-2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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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면 정미수 작품 <실크로드(絲綢之路)>. 길이 38cm, 너비 18cm. 명주 위에 수백가지 색깔의 실로 낙타 21 마리, 사람 24명, 개 3마리, 당나귀 5마리, 말 4마리가 수 놓여 있다.[사진=우시 무형문화재보호센터 제공]


인민화보 리후이펑(李慧鵬) 기자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지역의 자수인 ‘시수(錫繡)’에서 유래되어 발전해 온 ‘우시 정미수’는 정교함과 세밀함, 아름다움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는 자수 공예다. 명주로 이루어진 자수의 아랫단 위의 화폭은 크지는 않지만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으며, 글자는 쌀알처럼 미세하고 인물들의 머리는 콩알만 하다. 그러나 돋보기로 자세히 살펴보면 촘촘한 바늘땀과 생동감 있는 풍경, 은근한 운치까지 담긴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작품의 권폭(卷幅)이 작고 도안이 세밀한 까닭에 그 기술이나 풍격이 정교하고 미세하다 하여 ‘정미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특히 전통 자수공예에서 자수 매듭 뒷면에 실끝이 남는 단점을 극복하고 양면 모두를 아름다운 도안으로 꾸미는 ‘쌍면수(雙面繡)’ 기법은 사람들의 극찬을 받고 있다.

<아방궁(阿房宮)>[사진=우시 무형문화재보호센터 제공]


중국 강남(江南·양쯔강 이남)땅 물의 고향이자 풍부한 비단 산지인 우시 지역의 자수를 줄여서 ‘시수(錫繡)’라 부른다. 2000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시수가 가장 유명했던 명·청나라 때에는 집집마다 자수 도구인 수붕(繡棚)이 있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발전을 거듭하면서 시수에는 다양한 땀법이 생겨났고 여러가지 우수한 전통 기법도 축적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우시 지역주민들은 전통 자수를 바탕으로 창의성을 더해 ‘우시 정미수’를 탄생시켰다.

전통 자수의 본고장

우시는 시수가 태통한 곳이자 장쑤성 쑤저우(蘇州)의 자수인 ‘소수(蘇繡)’의 중요 기원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가 우시 메이리(梅里)를 도읍으로 정할 당시에도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자수를 놓은 채색 옷이 유행했다.
 

쌍면 정미수 작품 <고운하(古運河)>의 앞면과 뒤면[사진=우시 무형문화재보호센터 제공]


1908년 청나라 농공상부(農工商部)는 이패불(李佩黻) 등이 ‘석산수공전습회(錫山繡工傳習會)’를 설립해 자수에 그림을 넣을 것을 주장하자 중국 전통회화의 홍염(烘染)과 원경(遠景)의 많은 부분을 자수품에 재현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특별히 일등상을 만들어 수여하기도 했다. 그 뒤 자수는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벨기에 브뤼셀 만국박람회에서 일등금상을, 이탈리아 토리노 만국박람회에서도 금상을 각각 수상하는 등 시수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1915년 시수의 대표적인 인물인 화지(華璂)가 수놓은 <볏짚가리 위에 앉은 수탉(蹲在稻草堆的公雞)>이 파나마 태평양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작품은 서양의 과슈(Gouache)와 유화를 초고로 삼고 현대 회화의 사실적 풍격을 도입한 것이었다. 수백가지 색실을 통해 명암의 차이와 천지만물의 자연광채를 드러내는 등 창의성을 가미했다. 1938년 그녀가 다른 이들과 공동 저술하여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서 출판한 <자수술(刺繡術)>은 10년 동안 3판을 찍어내는 인기를 누렸다.

2008년 우시 정미수 기예는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우시 정미수 기예의 계승자인 자오훙위(趙紅育)는 1973년 시수 공예를 배우기 시작해 1981년 정미수 작품을 창작했으며 ‘쌍면수(雙面繡)’ 기법도 만들어 냈다.
 

돋보기를 통해야 자세히 볼 수 있는 우시 정미수의 세밀한 바늘땀. 작품은 크기는 작지만 생동감과 운치가 살아있다.[사진=우시 무형문화재보호센터 제공]


고난도 기법‘쌍면수’

1958년생인 자오훙위는 15세에 중화수품공장(中華繡品廠)에 들어가 자수공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시수의 대가인 화후이전(華慧貞) 등으로부터 사사한 그는 1979년 스승인 화후이전 등과 함께 우시시 공예미술연구소에 배치되어 시수의 창작과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1980년 우시시 공예미술연구소는 창의적 작품 발굴에 나섰다. 그는 처음에는 당나라 때의 전적(典籍)에서만 영감을 찾으려 했다. 이후 폭넓게 시야를 넓혔고 마침내 그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의 어렵고 힘든 노력으로 시수의 운명을 바꾼 ‘정미수 작품’과 ‘쌍면수’ 기법이 창조됐다.
 

국가급 무형문화재 우시 정미수 공예 전승자인 자오훙위[사진=우시 무형문화재보호센터 제공]


정미수 작품은 미세하면서도 실제와 가까울 만큼 정교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 과정이 대단히 까다롭다. 작업에서는 실을 이용한 기교를 가장 중시한다. 기본기로 실을 꼬고 푸는 ‘연송(撚松)’과 실을 쪼개는 ‘벽선(劈線)’이 있으며 보통 실 한 가닥을 70~80개의 미세한 가닥으로 나눈다. 전 과정에 걸쳐 가장 어려운 단계는 바로 70~80개로 나눈 가닥 중 하나를 이용해 인물의 얼굴에 눈과 눈썹 등 자잘한 부위를 그려넣는 ‘개렴(開臉)’이다. 이렇게 작업한 정미수는 멀리서 보면 입체감과 차원감이 한층 살아난다. 가까이 보면 인물의 기색이나 표정이 실제와 매우 흡사하다. 돋보기를 통해 보면 그 안의 세밀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관찰할 수 있다.
 

정미수의 기본기인 벽선(劈線). 실 한 가닥을 70-80개로 나눈다.[사진=우시 무형문화재보호센터 제공]


‘쌍면수’의 난이도는 훨씬 높다. 과거 시수는 모두 단면수(單面繡)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앞에서 보면 한 폭의 아름다운 도안이지만 뒤에서 보면 촘촘한 바늘땀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자오훙위가 개발한 ‘쌍면수’ 기법은 시수의 일대 혁신이라 할 수 있다.

보존과 계승을 위한 노력

40여 년간 시수를 보존해 온 자오훙위는 국가급 무형문화재의 전승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한때 그녀는 시수를 중도에 포기할 뻔한 적이 있었다. 1990년대 그녀가 몸담았던 우시시공예미술연구소는 급여조차 제대로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생계가 막막해진 그녀는 은행원 채용에 지원해 합격했지만 자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 순간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현대 생활이 발전하고 자수품의 실용적 기능이 점점 없어지면서 시장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기계나 컴퓨터를 이용한 자수의 등장은 전통 수공업에 큰 타격을 주었고 전통 수공예자들은 심각한 생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현재 정미수는 감상용 예술품 위주라 일반인들은 이들을 소비하고 감상할 경제적 여유가 없다. 게다가 정미수는 예술적 수준이 높고 기술이 까다로워 작업에 일정한 미적 내공이 요구되지만 예술가의 수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진정한 대가를 길러내는 데는 20-30년이 걸리기 때문에 시수에 종사하는 예술가의 수는 겨우 손에 꼽힐 정도이다.

다행히 우시시 정부의 지원으로 자오훙위의 제자 6명은 매달 보조금을 받고 있다. 이들은 스승의 곁에서 정미수의 전승을 위한 방안을 내놓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또한 자오훙위의 며느리도 가업을 잇고 있다. 그녀는 새로운 기술 도입 등을 통해 시어머니와 함께 우시 정미수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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