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도와주는 사람도 거들어 주는 사람도 없다. 모든 것은 제(기업인)가 하기 나름이다. 기업인은 죽어라고 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서정진 셀트리온그룹 회장의 말이다. 그는 창업 이후 어려울 때마다 결국 ‘모든 것은 나 자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구조조정은 직원뿐 아니라 가족들에게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굳이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먼저 경영자가 책임을 지고 그 다음으로 간부, 직원 순이어야 한다.”
경영진의 한 사람으로서 경영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난 서 회장은 회사를 떠난 직원들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창업을 결심했다.
서 회장은 삼성전기를 거쳐 한국생산성본부에서 근무하다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인연이 닿아 34살의 나이에 대우그룹 임원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대우그룹이 해체하면서 1998년 회사를 떠났다. 이듬해 대우자동차(현 한국GM) 기획실 직원 10여 명과 함께 셀트리온의 전신인 ‘넥솔’을 창업했다.
창업은 했지만 어떤 사업을 할지 업종을 정하지 못했다. 기회를 엿보던 중, 바이오 산업이 뜬다는 소문을 듣고 2000년 전세계 40개국을 돌아다니며 바이오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로부터 오리지널 바이오 의약품의 특허가 2013년부터 만료된다는 설명을 들은 서 회장은 2002년 ‘셀트리온’을 설립, 회장에 올랐다.
사업 개시 이후의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모든 초기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자금압박이 심각했다. 서 회장은 “사채까지 끌어다 회사 운영경비에 보태야 했을 정도였다. 하루하루 살기위해 몸부림쳐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바이오산업’에 대한 인식이 넓지 않아 셀트리온에 대한 시장의 부정적 반응도 큰 부담이었다.
바이오산업은 신약만 개발해 시판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단, 신약을 개발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리는 등 오랜 시간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급한 투자자들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여러 방면에서 셀트리온을 공격했다.
“갖고 있는 셀트리온 지분을 모두 외국계 제약회사에 팔겠다”. 2013년 4월 열린 기자회견에서 서 회장의 발언은 국내 증시를 발칵 뒤집어 놨다. 바이오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코스닥에서 시가총액 1위에 오르는 등 상위권을 유지하던 셀트리온이었기 때문이다. “주가를 끌어내리려는 공매도 세력과 싸움에 지쳤다”는 게 서 회장이 밝힌 이유였다. 기업 본연의 활동에 매달려도 시간이 아까웠던 서 회장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망하지 않기 위해 일했다. 대우차에서 겪었던 아픈 경험들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지난 6일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셀트리온의 항체 바이오시밀러(복제약품) ‘램시마’(성분명 인플릭시맵)의 판매를 허가했다. 앞서 한국을 포함해 세계 70여개국에서 렘시마를 판매했던 셀트리온은 전 세계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미국 시장에도 램시마를 진출시킨 것이다. 세상은 이제 그를 ‘셀러리맨의 신화’로 칭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