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정진영 기자 =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할배파탈'이란 별명을 얻었다. '할배파탈'은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남자를 뜻하는 프랑스어 옴므파탈(Homme fatale)을 변형한 말이다. 배우 정진영(52)은 그렇게 브라운관 너머 2030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글쎄요, 뭐가 궁금하세요? 제일 궁금하신 부분을 제가 제일 많이 듣지 않았을까요? 하하. 역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할배파탈'과 관련된 거겠죠."
그럼에도 정진영은 덤덤했다. 배우에겐 인기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게 기본이라고 했다. "어느 작품이나 배역으로 사랑받을 순 있는데 그게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지. 이 캐릭터에 대한 사랑일 뿐이니까 경계해야 한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브라운관 밖의 이들이 MBC '화려한 유혹'의 강석현을 '할배파탈'이라 불렀다면 그 안에 있던 정진영에게 강석현은 '움직이는 성채의 성주'였다.
"'화려한 유혹'의 원제목은 '움직이는 성채'였어요. 전 강석현은 그 '움직이는 성채'의 성주였다고 생각해요. '화려한 유혹'은 내(강석현) 성에서, 우리 집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었던 셈이죠. 우리 작품은 정통 사회 드라마나 정치 드라마는 아니지만 부패한 권력에 대한 풍자가 아래 깔려 있는 작품이었다고 봅니다."
움직이는 부패한 성채 속 가장 부패한 인간이었던 강석현은 운명 같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할 만큼 절실했던 이 여자에 대한 사랑을 단순히 이성적·육체적 그것이라 치부하긴 어렵다. 정진영의 해석에 따르면 은수(최강희 분)는 석현에게 거울과 같았다. 자신의 추악함과 더러움을 비추는. 그리고 죽어가는 석현에게 참회할 마지막 기회를 주는.
덕분에 석현은 삶의 마지막엔 죄를 뉘우치고 괴물이 아닌 사람의 편에 서게 됐다. 사랑하는 여자를 그녀가 진정 원하는 곳으로 보내줄 용기도 얻었다. 그리고 이제 배우, 혹은 인간 정진영이 남았다.
죽음으로 석현이 극에서 하차하면서 정진영에게는 남은 회차를 멀찍이서 지켜볼 시간이 생겼다. 그는 이를 "마치 영혼이 돼 남아 있는 사람들을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미련은 없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이야기들은 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다. 석현이 은수를 놓아준 것처럼 정진영 역시 석현을, '화려한 유혹'을, 그로 인해 얻은 혹은 잃은 것들을 놓아주고 있었다.
세상에 가져지는 게 어딨겠어요. 이 물병은 제 거지만 원래 제 것은 아니에요. 다만 지금 제가 쓰고 있을 뿐이죠. 죽으면 제 것이 아닌 게 되잖아요. 인간은 더욱 그렇죠. 우리의 영혼이 만나서 교류하고 있을 뿐."
정진영은 높은 시청률도 대중의 사랑도 당연한 게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위의 말이 왜 그가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를 이해하게 해 줬다. 적어도 정진영에겐 가진다고 가져지는 건 없다. 다만 자신을 스치고 지나갈 뿐. '화려한 유혹'도 '할배파탈'이란 수식어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