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73년 서울 종로5가에 ‘동진산악’이란 간판이 걸렸다.
“이거 국산이에요? 한국에서도 등산배낭을 만든다고요?”
“그럼요, 앞으로 한국도 외국 못지않게, 아니 더 잘 만들게 될 겁니다.”
호언장담한 주인공은 강태선 동진레저(블랙야크) 창업자. 그는 군수용품을 직접 개조해 국산 등산배낭을 최초로 시판했다. 그러나 사업은 쉽지 않았다. 그가 창업한 1970년대 초엔 등산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2년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
뼈아픈 실패였지만, 이대로 끝낼 순 없었다. 신혼이던 그는 결혼 피로연에서 받은 축의금 42만원을 종자돈 삼아 다시 가방을 만들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1977년 산악인 고상돈 씨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며 대학가에서 산악동아리 붐이 일기 시작했다. 강 창업자는 ‘프로자이안트’란 브랜드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그런데 겨울이 되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상계엄과 통금조치가 내려져 등산용품 수요가 급감한 것이다.
‘산을 타다 보면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지.’
강 창업자는 창업 초창기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얼마 뒤 통금이 해제됐고, ‘무박산행’ 개념이 도입돼 아웃도어용품 시장에 불이 붙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걸림돌이 됐다. 사람들이 산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심내 모든 산업이 호황을 이야기할 때, 그는 눈물을 삼켜야했다.
대기업들도 아웃도어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그는 흔들림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 결과 ‘등산용품 1위 브랜드’로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1990년대에도 위기상황은 계속됐다. 1991년 국립공원내 야영취사 금지조치로 관련 업체 80%가 문을 닫았다.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히말라야 등반에 나섰다. 산을 오르던 중 해발 4000~6000m의 고원에 서식하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야크를 목격했다.
“히말라야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묵묵하게 길을 가며 생명을 이어가는 블랙야크의 길이야말로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야크를 통해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히말라야 등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강 창업자는 심기일전해 1995년 ‘블랙야크’ 브랜드를 출시해 아웃도어 붐을 다시 일으켰다. 1996년에는 ‘산에 패션시대가 온다’는 광고 카피로 ‘패션 아웃도어’ 의류를 내세워 블랙 등산복을 유행시켰다.
1990년대 말에는 외환위기가 닥쳤다. 강 창업자는 위축되지 않고,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다. 노력의 결과, 동진레저의 블랙야크가 전문 산악인들 사이에 입소문 나기 시작해 정통 익스트림(전문 산악인용) 등산복 ‘빅5 브랜드’로 뿌리내렸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중국에서는 외국산 아웃도어 브랜드 중 인지도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그는 기업인이기 전에 산악인이다. 고향인 제주에서 그의 놀이터는 한라산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1박2일 한라산 등반을 즐겼던 그는 10년간 서울시산악회연맹 회장직을 지냈고, 에베레스트 등 세계 명산을 등정했다. ‘산사람’답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산에서 답을 찾았다.
그는 “환경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라”고 강조한다. 산에서는 환경이 생사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생사를 가른다. ‘빨리빨리’를 ‘천천히’로 바꾸기도 하고, 있는 길 대신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한다. 경영도, 인생도 그와 같다는 뜻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