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소녀의 시간은 또박또박 흘러왔다. 2004년 데뷔작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지나 ‘황진이’, ‘태왕사신기’, ‘써니’, ‘수상한 그녀’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정직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간 것이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도록 소녀는 자라났고 그만큼 작품 수도 늘어갔다. 누군가의 아역이었던 그는 어느덧 한 작품을 책임져야 하는 주연 배우가 되었다. 소녀의 시간 그것은 소녀, 심은경(22)의 성장이기도 했다.
3월 10일 개봉될 영화 영화 ‘널 기다리며’(감독 모홍진·제작 ㈜영화사 수작·㈜모티브 랩·㈜디씨지플러스제공 배급 NEW)는 연쇄 살인마와 피해자, 그리고 사건을 조사하던 형사의 쫓고 쫓기는 7일간의 기록을 담은 스릴러다.
“영화를 보고 나니 제 연기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진심이 전해질지도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언론시사회 직후 이루어진 기자간담회에서 심은경은 왜인지 자신 없는 기색을 보였다. 작품을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의 혹평 때문이었을까. 기자간담회 내내 심은경의 속내가 궁금했었다.
“돌이켜 보면 제가 너무 어렸던 것 같아요. ‘수상한 그녀’ 때만 하더라도 저를 어필할 말을 많이 했던 것 같거든요.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수상한 그녀’ 당시의 관심이나 주목도가 너무도 감사하지만 그게 저를 많이 가둬놨던 것 같아요. 제가 편협했죠. 어떤 게 옳고, 그른지도 몰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행착오도 겪었고…. 그냥 이제 솔직해지고 싶어요. 작품에 대한 고민을 왜 숨겨야 하나. 연기적인 고민을 왜 두려워하나 싶더라고요.”
덧붙이고 꾸미는 것이 싫어졌다는 스물두 살의 소녀.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냐”는 말에 “신중해지고 싶었다”는 말로 담담히 답한다.
“예전에는 무분별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얘기한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냥 저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연기에 있어서도 예전에는 ‘무조건 잘해야 해!’하고 다그쳤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이 역할을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어요. 보이는 연기 말이에요.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이번 작품에서 심은경은 15년 전 아빠를 죽인 연쇄살인범 기범(김성오 분)을 기다리며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소녀 희주를 연기했다. 희주는 복잡한 내면과 심리를 가진 인물로 천진하고 순수해 보이는 외모 이면에 잔혹함을 가진 아이다.
“희주가 한 인격에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잖아요. 순수함과 잔인성을 가진 인물인데 그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기존에 봐온 캐릭터와는 다른 순수함인 것 같았죠. 그 점에 끌려서 작품을 선택했지만, 그 부분이 가장 큰 고민이기도 했죠. 이 두 부분을 어떻게 공존시켜야 할까. 어떻게 해야 현실적일까 희주다울까 고민했었죠.”
그는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영화 ‘렛미인’을 두고 희주라는 역할에 관해 설명했다. 뱀파이어 소녀와 평범한 소년의 순수함과 잔혹성을 따오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는 ‘렛미인’ 오스칼과 엘리를 빗대어 “서로가 아끼는 모습을 두고 혐오를 느끼지 않지 않나. 희주 역시 동정심이 느껴졌으면”하고 바랐다고 전했다.
“살인마 기범의 재판을 본 날 희주의 안에 있던 정상적 사고가 깨진 것이라고 느꼈어요. 아버지의 유품인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서 아이의 틀이 깨진 것이라고요. 그 안에서 악마가 자란 거죠. 희주에게는 격분이나 광분이 아닌 감당할 수 없는 내면의 아우라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감정을 더 누르고 냉정하게 연기하고자 했죠.”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캐릭터기에 심은경은 연기하는 내내 괴로움과 우울함을 느꼈다. “할머니(‘수상한 그녀’)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도통 희주의 내면은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희주를 제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연기하느냐가 중요했던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를 보여드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영화의 완성본을 보는데 희주의 이중성이 돋보여야 했을까? 너무 과한 건 아니었나? 부족하진 않나? 머리가 복잡하더라고요. 연기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말한 건 이런 점들 때문이었어요. 희주의 표현에 있어서 스스로도 맞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제 진심이 얼마만큼 전해졌고 제가 얼마만큼 희주를 따라갔었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는 작품을 내놓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조금 더 냉정하게 자신을, 자신의 연기를, 캐릭터를 바라보았다. 때문에 조금씩 어긋난 부분, 아쉬운 부분이 포착되곤 했었다.
“아쉬웠던 장면은 모텔에서 기범과 싸우는 장면이에요. 연기적인 부분이 아쉬웠어요. 희주가 가진 감정과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부분이 달랐던 것 같아요. 희주의 잔인함을 밀도 있게 그릴 수 있었는데 겉으로만 표현한 것 같아서 아쉬웠어요.”
소녀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질문은 많았지만, 답은 도통 나오지 않았다. 물어볼 곳도 없고 정의도 내릴 수 없는 혼란 속에 그는 “답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캐릭터에 전사를 부여하는 대신 “시나리오 그대로,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했다.
“희주라는 캐릭터가 제가 비하인드를 만든다면 더 멀어질 것 같더라고요. 하하하. 사이가 안 좋아질 것 같아서 더하진 않았죠. 캐릭터에게 느끼는 혼란, 이상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건 몰라도 희주도 분명 혼란스럽고 이상한 기분일 것 같았어요.”
스릴러에 대한 로망은 여전한 것 같았다. 너무도 강렬하고 진한 범죄 스릴러를 연기했는데도 갈증은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전 스릴러에 대한 로망이 있어요. 제가 스릴러, 호러 매니아거든요. 또 연기적으로 감정의 폭이 넓고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게 바로 스릴러라는 장르인 것 같아요. 배우들은 한 번씩 꿈꾸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선과 악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하는 캐릭터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는 말끝에 “아직 갈증은 여전하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아쉬운 것이라며 “다음번에는 더 잔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동안은 꼭대기만 본 것 같아요. 더 높이, 잘해야만 한다고요. 모두 날 좋아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모두가 제 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게 처음엔 큰 상처였거든요. 저 자신을 믿지 못하게 돼버렸죠. 하지만 연기 잘한다는 소리만 듣고 싶은 건 욕심인 것 같아요. 이제 포장하지 않으려고요. 사실 아직까지도 이게 맞는 건가 고민돼요. 배우를 떠나서 인간의 성장통인 것 같고 저를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발판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