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오스트리아, 일본 등과 함께 대륙법 체계가 근간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정부가 독일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국내 법률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은 일견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한국에 진출하려는 외국, 특히 미국과 영국의 로펌 입장에서는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외교적 마찰, 갈수록 깊어질까 우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18일 국회에서 이상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항의 방문했다.
리퍼트 대사는 이 위원장에게 "법률 시장을 더욱 완전하게 개방하는 법을 채택할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했다. 이 서한에는 리퍼트 대사를 비롯해 찰스 헤이 영국대사, 게하르트 사바틸 유럽연합(EU) 유럽위원회 대표부 대사. 라비 크왈람 호주대리대사의 이름이 포함됐다.
국내 법률 시장 개방에 관련된 국가들의 관계자들은 개정안이 수정되지 않은 채 국회를 통과할 경우 외교는 물론 통상문제로 까지 비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심'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드러내 보이고 있다.
대사들의 항의를 받은 이 위원장은 법무부에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와 논의해서 범정부적인, 단일한 입장을 정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요 자유무역협정(FTA) 상대 국가가 반발하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협의해 외교적 마찰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해달라는 뜻을 전달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법안 내용을 재검토하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법무부의 반응은 무덤덤한 편이다. 법안을 낼 당시부터 관계부처와 협의했고 전문가들과의 논의도 거쳤다는 입장이다. 더구나 이미 국무회의도 통과한 만큼 정부의 모든 기관과 협의한 것으로 봐야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세력은 대한변호사협회이다. 협회는 성명을 통해 "리퍼트 대사 등이 국회를 항의 방문한 것은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이자 월권행위"라고 주장했다. 또 "외국자문사법 개정안은 한미 FTA협정문 유보안에도 부합하며 아무런 하자가 없다"며 "당사국들의 문제 제기로 입법절차가 중단된 것은 매우 유감이며 국회는 개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주요 쟁점과 다툼의 속내
리퍼트 대사 등이 지적하고 있는 외국법자문사법 개정안의 주요 쟁점은 3가지 정도이다.
첫째는 외국로펌이 국내로펌과 합작법무법인(조인트벤처·joint venture)을 설립할 경우 지분율과 의결권을 최대 49%로 제한하고 있는 부분이다.
궁극적으로는 경영권의 주체로 귀결되는 이 사안은 국내외 로펌들이 사활을 걸고 매달려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현안이기도 하다.
지분율과 의결권이 우세할 경우 국내외 로펌을 막론하고 유능한 변호사들을 영입하는 최대 무기 중 하나인 '보수결정권'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외국로펌의 경영 측면 지분이 49% 이상으로 강화된다면 국내로펌은 외국로펌에 사실상 흡수되거나 합병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는 까닭이다.
둘째는 조인트벤처에 참여하는 국내외 로펌의 업무 경력을 '3년 이상'으로 명시한 것에 대한 반발이다.
이 개정안은 외국로펌이 국내로펌에서 활동 중인 전문 변호사들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해 별도의 로펌을 구축하는 편법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국내의 유수한 대형로펌에서 '인재급' 변호사들이 외국로펌행을 선택한다면 예상보다 훨씬 더 급속도로 국내로펌의 입지가 축소될 수도 있다.
김앤장 소속 변호사는 "전체 국내로펌의 60% 이상이 업무경력 3년 이상인 것으로 안다"며 "이 조항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대규모 물량 공세 등을 통해 국내로펌의 인력을 빼가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조인트벤처의 업무범위를 제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안은 사법부와 직접 접촉하는 송무, 공증, 노무, 친족·상속 등의 분야는 국내로펌이 조인트벤처와는 별도록 수행할 수 있도록 한 조치다.
외국로펌의 주 업무 분야는 법률자문으로 꼽힌다. 반면 한국적인 정서 등을 감안해야 하는 송무 등의 업무는 국내로펌의 강점이기도 하다. 이 부문까지 외국로펌이 실력을 행사한다면 국내로펌의 설 자리는 좁아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3단계 개방안 일정과 향후 전망
국내 법률 시장 개방은 FTA 일정에 따라 취해진다. 당장 오는 7월 영국을 포함한 EU에 문이 열린다. 2017년 3월에는 미국의 로펌도 국내에 본격 진출한다.
이들 해외로펌은 한국에서 합작 법인을 세울수 있게 된다. 국내 변호사를 고용하고 국내 사건도 맡을 수 있다. 지금까지 국가의 보호막 속에서 법률 시장을 주물렀던 국내로펌이 외국로펌과 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국내의 대형로펌과 변호사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크고도 깊다. 이들의 목소리는 거의 한결 같다.
미국과 EU가 국내 법률 시장 개방을 코 앞에 두고 주도권을 거머잡기 위해 선제 공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이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한국의 법무부가 관계부처와 협의를 거쳐 개정안을 마련했고 이를 법사위에서 다루어 통과시키면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게 되는 것이니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정부와 국회가 외국의 압박에 밀려 개정안을 수정할 경우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은 선례'로 각인 될 것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대형로펌의 관계자는 "만약 이번 개정안이 수정된다면 여타 산업 분야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며 "외세의 압력에 휘둘려 정책이 변경된다면 국내로펌은 물론 최종적인 법률 소비자인 국민들까지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앤장의 한 변호사는 "무엇보다도 외국로펌의 조인트벤처 지분율과 의결권 49% 제한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제한이 풀어지면 영미계 로펌들이 엄청난 자본을 무기 삼아 국내로펌의 핵심 변호사들에 대한 영입 시스템을 최대한 풀가동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영미계 로펌이 몸집을 불리면 국내로펌은 갈수록 입지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영미계 로펌이 국내 법률 시장을 지배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토로했다. 이어 "국내로펌의 경쟁력이 약화되면 최종 소비자인 내국 기업과 개인들이 외국로펌에 비싼 법률 수수료를 부담해야하는 피해를 입을 우려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몇 년째 2조원 대의 시장 규모에 머물러 있는 국내 법률 시장에서 변호사 업계는 정체기에 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우리 법률 시장 규모는 5000여명의 변호사들이 세계 주요국가에서 활동하는 영미계 로펌 선두주자들의 연매출액 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대형 로펌의 한 관계자는 "최근 들면서 위임계약을 맡기 위해 경쟁이 과열되면서 심지어는 할인 공세나 출혈 수주까지 펼치는 지경에 이르렀을 정도"며 "법률 서비스 환경이 예전과는 전혀 달라진 상황에서 외국로펌까지 들어오면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부의 개정안을 심사 중인 국회 법사위가 어떻게 방향타를 잡을지도 관심사다.
이미 이 위원장은 "FTA 상대국들과 마찰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에서 개정안을 원안대로 통과 시키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현재 상태라면 이른 시일내에 개정안이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되기는 어려운 모양새다.
법무부와 외교부 등 관련 부처가 개정안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검토한 흔적을 보이고 이를 법사위 소속 의원들이 수긍한 뒤에야 전체회의에 올려질 가능성이 큰 셈이다.
다만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부 법사위 소속 위원들도 있다.
새누리당 김도읍 의원 등은 이미 법사위 1소위를 통과한 법안을 전체회의에 상정조차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됐 것이므로 개정안을 원안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같은 당 김진태 의원도 항의하는 상대국들의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법안 처리도 늦어질 뿐만 아니라 국내 법률 시장도 자칫 공황상태를 맞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는 늦어도 2월까지는 법무부 개정안을 처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FTA에 따라 오는 7월에는 영국을 포함한 EU에 법률 시장을 개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정안이 수정될 것인지, 아니면 원안대로 통과될 것인지를 놓고 법조계는 물론 국민의 시선도 쏠려있다. 이동재 유선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