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 거창 거열성 사적승격 청신호

2016-01-2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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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적 지정 학술 발굴조사, 주민 현장설명회 및 전문가포럼 개최

아주경제 이채열 기자 =경상남도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는 거열성(居列城)의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승격에 파란불이 켜졌다.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는 25일 10시부터 거열성의 축조시기 및 축조주체를 규명하기 위한 전문가포럼 및 주민설명회를 개최한다. 거창군이 발주하고 경남발전연구원이 진행하고 있는 거열성 학술 발굴조사 용역의 중간 결과를 점검하는 의미를 두고 있다.

건흥산(해발 572m)에 조성되어 있는 거열성은 거창군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삼국사기』에 관련기록이 등장한다. 거열성은 백제멸망 후 3년간 백제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다 문무왕 3년인 663년 신라장군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에 의해 함락되어 백제부흥운동군 700명이 전사한 역사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둘레 약 1,115m로 고대산성의 축성기술이 매우 잘 남아있으며, 산 정상 계곡부에 대형 집수시설이 조성되어 있는 등 그 중요성이 익히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거창지역은 가야·신라·백제가 서로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뺐고 뺐기는 각축이 이루어진 군사적 요충지로 거열성을 비롯하여 21개소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특히『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3년인 673년 나당전쟁(羅唐戰爭)을 대비하기 위하여 신라의 거점지역 9곳에 산성을 쌓은 기록이 확인되는데, 여기에 나오는 거열주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은 거열성을 지칭한다고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거열성은 그 역사적 중요성과 가치가 매우 큰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거창군에서는 거열성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사적으로 승격하기 위하여 2014년부터 학술대회 및 문화재 발굴조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번 거열성 학술 발굴조사에서는 거열성이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분되어 축조된 특별한 구조의 이중성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을 통해 6세기 중엽부터 9세기까지 300년간 지속적으로 사용된 중요한 산성임이 밝혀졌다. 특히 기존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내성의 존재 및 축조기술은 6세기 중엽 고대산성의 축조기술을 밝혀 줄 획기적인 자료로 파악된다.

연이어 축조된 외성은 내성과는 다른 통일신라 석축산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663년 백제부흥운동군이 활약한 거열성과 이후 673년에 증축된 만흥사산성의 관계를 검토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를 확보하였다.

현재까지 실시된 거열성에 대한 학술 발굴조사를 종합하면, 거열성은 삼국~통일신라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된 산성으로 석축산성의 축조기법 변화를 확인할 수 있으며, 거창지역에서 가야·신라·백제의 역학관계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사적 승격의 진정성을 지니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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