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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성류굴 입구 암벽에서 발견된 명문 탁본. [사진제공=위덕대학교 박물관]
아주경제 최주호 기자 =경북 울진군은 성류굴 입구 암벽에서 또 다시 삼국시대 신라 금석문이 발견됐다고 16일 밝혔다.
명승지인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의 입구 바로 위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데,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에 고대의 금석문이 발견된 것은 국내 처음 있는 일이다.
명문은 성류굴 출구의 위쪽 가로 30㎝, 세로 20㎝되는 석회암면에 세로 7행 38자가 새겨졌으며, 글자의 크기는 가로 3㎝, 세로 4㎝ 정도로 음각돼 있다.
글자는 예서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해서체이며, 새겨진 연대를 말해주는 첫째 줄은 비교적 또렷한 편이다.
그 밖의 명문들은 석회암 특유의 종유가 흘러내려 새겨진 글자 획의 일부를 덮고 있거나, 표면 박락된 곳이 있어 판독을 어렵게 하는 가운데 현재까지 30여자가 읽혀진다.
명문의 후반부는 해석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신라 진흥왕 4년(543년) 3월 8일에 △축부(△丑付) 대나마(大奈麻, 신라 시대 17관등 중의 10번째에 해당하는 경위)가 울진 성류굴에 왔다가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울진 성류굴은 삼국시대부터 신성한 명승지였으며, 삼국시대 금석문, 통일신라시대(‘삼국유사’의 내용), 고려시대 말기 탐방기(이곡의 ‘동유기’), 조선시대 전기의 김시습의 시, 조선시대 후기 겸재 정선의 성류굴그림 등 각 시대의 사료를 모두 가진 국내 유일의 명승지였음이 밝혀졌다.
이 명문은 신라 중고기 금석문의 기재방식인 직명+부명+인명+관등명 순에서 아직까지 출신 부명이 확인되지 않았다.
‘대나마(大奈麻)’의 관등명이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 524년)와 동일한 글자로 되어 있는 점과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 명문을 조사한 학자들은 명문의 첫 부분인 ‘계해년(癸亥年)’이 543년과 603년(진평왕 25년) 및 663년(문무왕 3년) 중에서 543년에 해당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이 명문을 발견한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성류굴 입구 주변 암벽에는 이번에 발견된 명문 외에도 종유에 덮이거나 마모된 문자들이 보이는데, 이에 대한 추가정밀조사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성류굴 명문이 신령한 경승지를 방문한 사실을 새겼다는 점에서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의 명문들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이와 더불어 울주 천전리 각석은 경주 월성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5㎞정도 떨어져 있지만, 울진 성류굴 각석은 126㎞나 떨어진 경승지의 암벽에 새긴 연대를 알 수 있는 방문기가 발견된 것은 현재까지 이것이 유일하다.
이 명문에 대해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고대사)는 “당시 왕경의 관리가 성류굴에 왔다간 것은 이곳의 신성함과 관련시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울주 천전리 각석과 더불어 풍광 좋은 암벽에 새긴 삼국시대 명문은 매우 귀한 것으로 신라사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했다.
이영호 경북대 교수(신라사)는 “최근에 성류굴 입구에서 명문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충북 제천 점말동굴 입구에 각석들이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로 신라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제까지 울진 성류굴 명문을 조사해 온 학자들은 이 명문이 모두 판독되고 그 내용이 해석되면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비롯해 삼국시대를 보완할 수 있는 6세기 신라의 관등, 제사, 지방통치 등을 연구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