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SK와이번스 홈페이지]
지난 9일 SK와이번스는 NC에서 방출된 이승호를 영입했다고 밝혔다. 2011년 FA자격으로 SK를 떠나 롯데 자이언츠에 새 둥지를 틀었던 이승호는 이로써 3년 만에 친정팀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는 NC 다이노스에서 좋은 공을 뿌리지 못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2군에서 보낼 만큼 부진했고, 이제 전성기 시절 구위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SK팬들은 한 목소리로 ‘원조 에이스’이자 김광현 이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아픈 손가락’ 이승호의 귀환을 반기고 있다.
2000년 쌍방울에 1차 지명된 이승호는 팀이 SK에 인수되며 SK 와이번스 원년 멤버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드래프트 동기로는 천안북일고의 봉황대기 우승을 이끌며 전국구 스타로 부상한 조규수, 삼성의 에이스로 발돋움 하는 배영수 등이 있었다.
일생의 한번뿐인 신인왕은 데뷔 첫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무려 139⅔이닝을 던지고 10승12패9세이브, 방어율 4.51, 탈삼진 132개를 기록한 이승호의 몫이었다. 한화 이글스의 조규수도 풀타임 선발 첫해 10승을 거두는 등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부르면 나와 늘 자신의 역할을 다한 이승호가 신인상을 받는데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루키 시절부터 베테랑 투수처럼 신임 받았다.
이후 이승호는 초창기 SK가 어려웠던 시절 팀의 가장 믿을 만한 투수로 활약했다. 팀이 어려울 때는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불려나와 배짱 있는 투구를 선보였다. 2000년 139⅔이닝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무려 220⅔이닝을 던졌고, 2002년에는 142⅔이닝을 투구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하지만 데뷔 초기 혹사의 후유증은 부메랑이 되돌아왔다. 그는 2004년 169이닝을 던지며 15승9패의 좋은 성적은 거뒀지만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2005년 부상으로 시즌을 통째로 날린 후 2006년 어깨 수술을 받고 2007년까지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2008년 다시 마운드로 돌아왔지만 볼의 스피드나 묵직함은 예전 같지 않았다. 기교파 투수가 된 그는 선발을 포기하고 중간 계투로 보직을 바꿔야 했다. 그럼에도 이승호는 늘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그 몫을 다하는 선수였다. 2008년 복귀 후 바로 불펜 필승조로 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최초로 4홀드를 기록하는 증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듬해인 2009년에는 무려 68경기에 나와 106이닝을 던지며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도왔고, 2010년에 65게임 89⅔이닝, 2011년 51게임 64⅓이닝을 던지며 SK 벌떼 야구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그는 부상으로 2시즌을 날린 탓에 데뷔 이후 2011년 10시즌 만에 겨우 FA 자격을 획득했고, 4년 총액 24억의 금액으로 정든 팀을 떠나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그는 2011년 롯데 불펜에 단비와 같은 활약을 펼친 후 2012년 NC다이노스가 보호선수 외 특별지명권을 행사하며 NC로 이적했다. 이후 NC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2군에 머무르다 이번 시즌 보류 선수 명단에서 빠지면서 사실상 방출됐다.
이승호는 SK시절 통산 374경기에 나와 총 1068이닝을 던져 73승 64패 41세이브 22홀드 3.78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기록만 봐도 그가 SK시절 얼마나 많은 경기에 나와서 얼마나 많은 공을 던졌는지 알 수 있다. 전문가들과 팬들은 뛰어난 구위와 역동적인 투구폼을 지녔던 그가 어린 시절 혹사를 당하지만 않았어도 선발 투수로 뛰며 배영수에 버금가는 스타가 됐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젊은 시절을 SK에 바쳤고, 그래서 때론 아팠지만 그래서 또 SK의 얼굴로 남을 수 있는 선수다. SK 팬들은 아직 잊지 않았다. 암흑의 시절과 빛나는 영광의 시절에도 늘 이승호가 선발과 불펜에서 팀과 함께 있었음을 말이다. 팬들이 전성기가 지난 30대 중반의, 이제는 ‘평범해진’ 투수를 반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