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강승훈·국지은 기자 = # "명동을 지나다보면 '여기가 어느 나라일까'란 생각이 문뜩 들어요. 길거리에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서도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간판들이 대부분 영어라서요. 알파벳 모르는 사람들은 가게를 찾아가지도 못하는 걸까요(?). 이국적이라기보단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듯 해요."
# “아직도 남아있는 편견 때문인지 온전히 한글로 가게 이름을 지으면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어요. 주위의 시선 역시 그렇구요. 반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겉으로만 그럴싸한 상호가 붙으면 같은 상인 입장에서도 눈길이 한번쯤 가곤 합니다. 특히나 상당수의 프랜차이즈(가맹점) 등은 외래어를 쓸 수밖에 없어요."
커피숍을 운영 중인 김동민(40)씨는 국적 자체가 불분명한 단어에 대해 스스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반성했다. 이날 둘러본 명동거리는 그야말로 '무국적 언어'로 넘쳐났다. 한 3층짜리 건물에 달린 간판 15개 가운데 80%(12개)가 외래어 표기였다. 이외 1개는 영어를 한글로 그대로 옮겼다.
9일 '제569돌 한글날'을 앞둔 시점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정부가 우리글의 우수성을 기리자며, 앞서 한글날을 휴일로 지정했지만 아직 사회전반의 공감대는 얻지 못한 듯싶다.
대학 주변도 예외는 아니다. 김진희 한남대 교양융복합대학 강사가 지난 8월 20일부터 한 달간 수원 성균관대역 일대 608개의 간판상호 언어를 살펴본 내용을 보면, 고유어는 72개로 전체의 12% 수준에 그쳤다. 여기서 외래어의 비율은 34%(204)개로 가장 컸고, 한자어도 23%(140개)에 달했다.
또 192개로 집계된 혼용어 가운데서는 고유어+한자어 100개(16%), 고유어+외래어 36개(6%), 한자어+외래어 47개(8%), 고유어+한자어+외래어 9개(1%) 등이었다. 표기법을 지키긴 커녕 언어의 종류 조차 파악이 어려운 경우도 수두룩했다.
김진희 강사는 "간판에 드러난 언어는 우리의 삶에서 쉽게 마주하게 되고, 그만큼 은연 중 언어생활 및 인식에 영향을 준다"라며 "특히 외래어 표기 오류가 많았는데 뜻이 잘 통하지 않거나 모호한 것도 많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모습은 관광지나 대학뿐 아니라 행정용어 등 우리 일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법령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처분(假處分)은 대표적 한자어로 최근 임시처분이란 말이 권해진다. 또 우리말이나 쉬운 표현을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용하는 단어들에는 견출지(見出紙)→찾음표, 시말서(始末書)→경위서, 내구연한(耐久年限)→사용가능 기간, 잔반(殘飯)→남은 음식, 음용수(飮用水)→먹는 물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 잔재 용어들은 서둘러 정비해야 할 대상이다. 최근 서울시가 한글(국어) 시민단체, 대학, 연구기관 등과 함께 점검을 벌여 일본식 한자어 및 일본어 투 생활용어 바로잡기에 나섰다. 그 결과 선정된 순화어는 쇼부→승부, 분빠이→분배, 기스→흠, 오케바리→좋다, 곤색→감색, 노가다→(공사판)노동자, 쓰키다시→곁들이찬 등을 바르게 고쳐 쓰도록 했다.
이와 관련 서울시가 자치법규 제정(개정) 때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어나 일본식 용어 등의 사용을 피하고 쉬운 용어를 반영토록 법제 심사를 강화키로 했다. 공공기관에서 솔선수범하자는 취지다.
앞으로 5년간(~2019년) 추진될 이번 '서울특별시 국어발전 기본계획'은 △공공언어 개선을 통한 시민소통 활성화 △국어사용 환경 개선 △국어(한글) 발전과 보전을 위한 노력 등 3가지 추진 목표를 기반으로, 9개 분야에 18개 실천 과제로 마련됐다.
서울시는 시민소통 확대 차원에서 알기 쉬운 행정용어의 사용 확대, 자치법규 용어 정비 등 공공언어 개선을 꾀한다. 바른 공공언어를 사용하는 조직 문화를 만들자는 취지로 공공언어 기관평가도 실천한다.
황보연 서울시 시민소통기획관은 "그동안 각 부서가 개별적으로 추진하던 사업들을 중장기적 관점에서 '국어발전 기본계획'으로 엮었다"며 "앞으로 시민들과 함께 한글의 가치를 높이고 국어 사용의 모범이 되는 한글도시 서울을 만들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