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한파’ 日기업인 고바야시 전 후지제록스 사장 별세(종합)

2015-09-0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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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요타로 전 후지제록스 사장[사진=한국후지제록스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한아람 기자 = “후지제록스는 항상 새로운 것, 다른 것을 제안하고 제기하여 세계를 리드해 나갑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우리가 중요시해 온 모토입니다. 쉽게 말해 ‘너무 거기서 거기인 것들만 내놓지 마라.’ 이것이 고객의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워서 떡 먹기 같은 일이라면 애써 우리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면 도전적인 일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이왕 시작한 이상 ‘압도적 1등’을 목표로 하십시오.”

고바야시 요타로(小林陽太郞) 전 후지제록스 사장이 지난 2009년, 46년간 몸담아왔던 후지제록스를 떠나며 임직원들에 남긴 퇴임연설이다.
여기서 말하는 ‘압도적 1등’은 고바야시 사장이 한창 경영을 펼칠 때 직원들을 격려할 때 언급한 말로, 타사에 대한 비교우위나 한 단계 앞서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세상을 놀라게 할 압도적인 우월함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 재계 최고의 국제파이자 ‘지한파’(知韓派)로 불렸던 고바야시 사장이 지난 5일 만성 농흉(늑막강에 고름이 생기는 질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1933년 고바야시 세츠타로 후지필름 홀딩스 창업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게이오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와튼 스쿨에서 공부하고 경영학석사(MBA)를 받았다. 1958년 아버지의 회사인 후지필름(현 후지필름 홀딩스)에 입사했지만 후지필름이 미국 제록스와 합작해 후지제록스를 설립하자 자리를 옮겼다.

고바야시 사장이 후지제록스에 근무한 43년간 회사는 크게 3번에 걸쳐 변화를 맞이했다.

먼저, 일본의 고도 성장과 궤를 같이한 회사의 급성장 시기다. 후지 제록스는 사무 합리화의 물결을 타고 시장을 석권했는데, 당시 37세의 청년 이사였던 그는 ‘모레쓰(맹렬·猛烈)에서 뷰티풀(아름다운)로’라는 기업이념을 제시하고 경제 지상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진정한 풍요 로움을 호소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두 번째는 1973년 오일 쇼크 시기다. 당시에는 일본의 전 산업계가 실적이 급락해 회사가 존폐의 위기까지 몰렸는데, 후지제록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일본내 복사기 시장 점유율 70%에 달했던 회사는 후발주자인 리코의 공세에 밀리며 50% 아래까지 떨어졌다.

값싸고 좋은 제품으로 치고 오는 리코의 도전에 후지제록스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그 때에도 완제품 판매가 아닌 한 달에 얼마씩 요금을 받는 렌탈방식이 주류였는데, 후지제록스는 렌탈료를 인상한 것이다. 판매 감소로 낮아진 수익성을 요금 인상으로 만회하려고 한 것이다. 영업당당 상무였던 고바야시 사장도 내심 “좋지 않아”라고 생각했지만 세계 최초로 복사기를 개발했다는 자만감과 더불어 정확한 시장 분석 없이 리코의 복사기는 가격이 저렴한 만큼 성능이나 신뢰성이 떨어질 것이라며 경쟁사를 낮게 평가했다.

이에 1974년에만 두 차례에 걸쳐 인상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큰 낭패였다. 고객사들의 불만과 저항이 극에 달하며 시장 점유율은 더 떨어졌다. 뒤늦게 리코의 제품을 분석해 보니, 리코는 싸고 성능좋은 기계를 일찌감치 개발해 착실히 이익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사적품질관리(TQC)의 덕분이었다.

이에 고바야시 사장은 아사카 데스이치 도쿄대학교 교수에게 부탁해 후지제록스의 TQC 도입을 추진했는데, 아사카 교수는 고바야시 사장은 물론 회사 전 임직원들이 몰랐던 회사의 진정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경영에 TQC를 도입한다는 것은 사업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에 기반해 경영을 효율화 시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아사카 교수는 “최고경영자(CEO)나 임원, 간부들은 ‘사원들이 일을 제대로 안한다’는 불만만 쏟아낸다”고 일침했다.
이 말해 고바야시 사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도 “이런 강력한 라이벌이 출현했는데 현장인력들은 왜 간과하고 있었을까”라고만 생각했을 뿐, 먼저 실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사카 교수의 질책을 받아들인 고바야시 사장은 “조직 상부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생각을 바꾸지 안으면 경쟁에서 이기는 전략은 태어나지 않는다”며 임원들의 의식개혁을 주창했다. 덕분에 회사는 위기를 벗어났다. 이어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바야시 사장은 회사 경영의 지향점을 ‘사물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경영’으로 삼았다.

1978년 45세의 나이에 사장으로 취임한 고바야시 사장은 1980년대 들어 또 다시 고비를 맞게 된다. 회사를 살린 TQC였는데, 실적이 좋아질수록 사내에서 “TQC는 군대 같아서 싫다”라는 불만이 제기된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 기업들의 거침없는 확장이 이어졌는데 오히려 후지 제록스는 침체기를 겪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고바야시 사장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직원들의 개성을 살리는 경영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강한 회사’가 아닌 ‘좋은 회사’를 지향한다는 것인데, 사회에 ‘좋은 제품’을 제작하는 한편 인생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직장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이에 임직원 능력평가에 자원봉사 활동 등 대외적 활동도 포함하는 한편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하는 선진 인사 제도를 잇달아 도입했다.

고바야시 사장은 일본 산업의 미래를 짊어질 차세대 젊은 리더들에게 “자신에게 정직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데이터나 숫자 이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인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적어도 90% 이상 스스로 정직하다고 납득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때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바야시 사장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성선설(性善説)의 경영자’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인간의 본질은 ‘선(善)’이고, 따라서 강한 주인의식을 갖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최선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정직하지 못한 일본 정부와 자주 충돌했다. 지난 2004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와 일본 재계 인사들과의 간담회에서 그는 기업인중 유일하게 “중국의 이해를 얻을 수 없다. 참배해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고바야시 사장 자택에 일본 우익단체 사람들이 감시를 하고, 현관 옆 수풀에서는 화염병이 발견됐으며, 심지어 그의 앞으로 실탄이 배달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바야시 사장은 일본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에게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미국,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촉구하며 모든 국가들이 공동 번영할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했던 그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의 경영자단체인 경제동우회 대표 간사를 맡았으며, 중일 양국 재계인사와 지식인 등으로 구성된 '신(新) 일중우호 21세기 위원회'의 일본 측 초대 좌장을 맡는 등 한중일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또한 지난해 니폰닷컴과 진행한 생애 마지막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한중일 관계 개선과 관련, “역사 인식의 문제를 드러내면 해결될 수 없다. 한국과 중국이 좀 더 현실적이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보통의 일본인들 가운데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의 발언이 문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고인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한국 재계 인사들과 자주 교류한 ‘지한파’ 기업인이었다. 1962년 설립된 후지제록스는 12년 만인 1974년 동화산업과 50대 50의 비율로 합작투자한 ‘코리아제록스’를 설립했으며, 1998년 한국이 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었던 시기에 회사 지분 100%를 인수해 ‘한국후지제록스’로 사명을 바꾸고 후지제록스 그룹의 자회사로 새출발하는 등 한·일경제교류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지난 2004년 고바야시 사장은 한국을 방문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만나 양국 경제 활성화를 위해 협력키로 한 바 있으며, 2003년 도쿄 롯본기에 완공한 28층 규모의 일본삼성 신사옥에 11개층에 입주해 사용하는 등 삼성과의 우호적 관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후지 제록스의 창립자인 고바야시 세츠타로 초대 회장을 기리고자 1977년 설립된 ‘고바야시 세츠타로 기금’을 통해 일본내 대학교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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