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한국에서 전문경영인 기업은 통상 ‘주인없는 기업’이라고 부른다.
두 단어의 의미는 같지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오너경영에 대한 애착이 심해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그보다는 전문경영인체제를 지향하면서도 이를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기업들의 잘못도 있다. 한국의 전문경영인 기업으로는 공기업에서 민영화 한 포스코와 KT가, 그룹 해체로 채권단 관리 체제로 넘어간 대우조선해양 등 만이 거론될 정도다. 이들 기업들은 모두 최고경영자(CEO)가 바뀔 때마다 대규모 부실을 기록하며 불신감을 던지고 있다. “주인이 없으니 다들 해먹는다”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도요타자동차 오너 복귀와 그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다. 보고서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너경영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오너 가문의 부상으로 인해 IMF 외환위기후 정부가 주도했던 기업 지배구조 개선 노력이 후퇴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우려를 제기한 것이다. 또한 오너경영에도 장점이 있으나 일방적인 오너경영 옹호론은 논리적 근거가 취약할 뿐만 아니라 소유구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저해할 소지가 다분하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보고서는 “소유구조는 기업의 성장과 부침에 따라 변화하며, 기업공개 및 후대 승계가 거듭되면서 오너경영에서 전문경영으로의 전환이 일방적”이라며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이 대세임을 강조했다.
전문경영인체제 14년 만에 오너 경영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한 도요타를 예로 들었지만, 당시 한국 재계도 오너들의 경영 복귀가 속속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고서가 던지는 파장은 컸다.
보고서가 발표된 2009년은 큰 홍역을 치르며 정준양 회장이 포스코 회장으로 취임한 해였다. 회장 추대건을 놓고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주인없는 기업’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포스코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경영인체제의 기업이었고 가장 민주적인 의사결정제도를 구축했다고 자부하는 기업이었는데, 이러한 자랑거리가 그대로 무너진 것이다. 회사의 입장과는 무관하지만 포스코경영연구소를 통해 전문경영인체제의 우월성을 홍보하려고 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렇게 6년이 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문경영인체제의 포스코는 지금 오너경영체제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권오준 회장이 취임하면서 공동 대표제도를 버리고 권 회장 단독 대표체제를 구축하면서 임원 수를 대폭 줄였다. 단독 대표 아래 빠른 의사결정체제를 이뤄내기 위함이다. 또한 오너의 직속기구로 사업구조 재편과 재무구조 개선 등 조정 기능을 수행하는 가치경영실을 신설했다. 가치경영실은 일반 대기업의 기획조정실과 같은 조직이다.
단독 대표체제와 가치경영실제도 도입은 오너십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권 회장에게 그만큼 막중한 경영책임이 부여되지만 최소한 회장 임기 기간 동안은 권 회장이 생각하는 포스코를 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포스코가 자랑으로 내세웠던 집단경영체제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분석됐다. 정부투자기업이었던 포스코가 민영화한 2000년을 전후로 회장으로 취임했던 인사들의 임기는 평균 5년이었다. 유상부 회장(1998년 3월~2003년 3월), 이구택 회장(2003년 3월~2009년 2월), 정준양 회장(2009년 3월~2014년 2월) 등이 그들로 연임에는 성공했지만 임기는 다 채우지 못했다. 5년은 정권 교체시기와도 맞물린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포스코 회장도 교체되는 게 당연시 되는 상황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끊임없이 포스코를 쥐고 흔드는 기득권층의 횡포 때문이라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이들의 개입이 포스코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스코가 지금의 전문경영인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설립자인 고 박태준 명예회장 덕분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오너는 아니었지만 오너 경영인 못지않은 카리스마로 포스코를 이끌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포스코에 들어오는 압력을 막아내 회사가 현재의 위상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박 명예회장이 2011년 별세하면서, 포스코의 지배구조는 크게 흔들렸다. 불과 하루 만에 모든 바람을 맨몸으로 맞는 상황을 맞이한 포스코는 홀로서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전문경영인체제의 장점으로 불리는 유능한 경영인에 의한 효율적이고 투명한 경영을 실현하지 못한 채, 의사결정 과정의 지연 및 단기실적이 집착하는 단점만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포스코는 가장 모범적인 후계 경영인 양성코스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지만, IBM을 부활시킨 루 거스너나 닛산의 카를로스 곤 가은 스타 전문경영인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정준야 전 포스코 회장이 재직시절 사내 인터뷰에서 “광양제철소장 근무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제도 개선을 회장 취임 후 실행해 옮기려고 했는데 직책 보임자들과 임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후 직책 보임자들은 추진을 시도했지만 직원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중단됐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그만큼 그룹을 이끌어가는데 있어 내부의 반발이 컸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포스코가 내적 문제로 주춤하는 사이, 강력한 오너십을 배경으로 한 현대제철이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철강생산의 규모, 기술력에 있어 여전히 포스코는 비교 우위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우위를 언제까지 누릴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권 회장이 강력히 사업 및 조직 구조개편을 추진하는 것은 권 회장이 매우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2009년 2월말 퇴임한 서윤석 당시 포스코 이사회 의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포스코에도 오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투명경영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소유-경영의 분리’가 바람직하다”면서 “최고경영자(CEO)를 임명하는 이사회 의장 자격만 유지하면 ‘경영하는 CEO’, ‘임명권을 가진 오너’라는 안정적인 경영·지배구조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그만큼 한국에서 전문경영인체제가 정착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