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위기와 시도, 그 불완전한 동거에 대하여

2015-07-28 09:03
  • 글자크기 설정

[사진=뮤지컬 '데스노트', '아이랑', '팬텀', '베어 더 뮤지컬' 포스터]

뮤지컬평론가 최승연 = '두 도시 이야기'의 파행이 벌어진 지 1년이 지났다.

그동안 한국 뮤지컬 시장은 ‘위기론’에 직면해야 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다양한 목소리들을 들어야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근본 질서는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 뮤지컬 시장의 병폐는 급속한 성장이 동반한 고질적인 문제점들-시장의 규모를 초과하는 작품 편수, 소수의 스타에 의존하는 제작 구조, 마니아 중심의 시장, 상업주의의 팽배 등-을 떠안은 상태로 끝없이 직진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업계 종사자들이 모두 인식하고 있지만 한번 굳어진 제작 환경과 문화를 타개할 묘수를 쉽게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약 찾더라도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는 사실 역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여기, 2015년 여름의 뮤지컬 시장을 들여다보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라이선스의 규모와 편수가 창작뮤지컬을 압도하고 있다. '유린타운'(신시뮤지컬컴퍼니), '엘리자벳'(EMK),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설앤컴퍼니), '맨 오브 라만차'(오디뮤지컬컴퍼니) 등 주류 제작사들의 대형 주력 레퍼토리들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여신님이 보고계셔'(연우무대), '빨래'(씨에치수박), '왕세자 실종사건'(극단 죽도록 달린다), '형제는 용감했다'(PMC) 등 ‘검증된’ 중소극장 창작뮤지컬 레퍼토리와 올해 20주년을 맞은 '명성황후'(에이콤)가 이에 맞서고 있다. 이처럼 대형 라이선스에 맞선 창작뮤지컬의 레퍼토리는 주로 중소극장 규모의 작품들이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제기되던 창작뮤지컬 제작의 실리 추구 프로젝트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결론을 얻는다. 다만, 당시에는 창작뮤지컬의 대형화 현상이 시장의 생리와 무관하게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규모를 줄여 제작의 노하우를 착실하게 쌓아 가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다면, 현재에는 라이선스에 압도된 시장의 구조가 대형 창작뮤지컬의 제작을 사실상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수익 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중소형 규모를 지향한다는 차이를 보인다.

한편 위와 같은 ‘안정적’인 라인업 사이에서 발견되는 신작들은 시장의 지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먼저 라이선스로는 '체스'(엠뮤지컬아트), '팬텀'(EMK), '베어 더 뮤지컬'(쇼플레이) 그리고 '데스노트'(씨제스컬쳐)가, 창작뮤지컬로서는 '아리랑'(신시뮤지컬컴퍼니)이 눈에 띈다. 이 작품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라이선스의 진원지가 ‘일본’으로 확대되고 있다. '데스노트'를 제외한 나머지 세 작품은 모두 브로드웨이산이지만, 국내 시장에 처음 진입한 일본발 '데스노트'는 스타 마케팅과 원작의 유명세에 힘입어 나머지 브로드웨이산을 현격히 압도하는 이슈 몰이에 성공하였다. 이는 올해 12월에 공연될 '오케피'(샘컴퍼니)로 이어져 ‘일본 창작뮤지컬의 수입’이라는 또 다른 라이선스의 흐름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 전망된다.

둘째, 신작들은 새로운 것과 낯익은 것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체스'는 ‘체스’라는 낯선 소재를 정치적 긴장 관계에 놓인 인물들의 갈등에 녹인 브로드웨이 뮤지컬로서, 국내 뮤지컬 시장의 취향과는 다소 무관한 세계를 보여준다. '실크 스타킹', '어쌔씬', '뷰티풀 게임' 등 정치적 현실이 개입된 영미 뮤지컬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들이 공연된 후 국내 시장에 끼친 영향력은 미미했다. 또한 콜 포터의 작품으로서 일본에서 공연된 '실크 스타킹'은(일본에서는 이 외에도 '키스 미 케이트', '캉캉', '애니싱 고우즈', '파나마 해티' 등 콜 포터의 작품이 다수 공연되었다. '키스 미 케이트'와 '캉캉'은 일본에서 다카라즈카 버전으로도 제작되었다.) '체스'와 동일하게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다. 반면에 '팬텀', '데스노트', '아리랑'은 국내에 잘 알려진 원작, 즉 이미 검증된 콘텐츠를 사용하고 있다. '팬텀'은 한국 뮤지컬 산업화의 시원인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원작을 사용하고 있으며, '데스노트'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변주되어 이미 성공한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또한 '아리랑'은 조정래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따라서 제목만 들어도 뮤지컬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베어 더 뮤지컬'은 한국 뮤지컬 시장에 형성되어 있는 ‘동성애’ 취향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셋째, 이와 같은 신작들은 텍스트의 내적 논리에 의한 흡입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한 편의 뮤지컬은 드라마와 음악이 서로 정교하게 공명할 때, 특유의 ‘파괴력’이 작동될 준비를 마친다. 그러나 2015년 여름의 신작들은 텍스트의 내적 논리보다 그 외의 것에 주력하는 듯하다. 가령 '체스'를 보자. 서로 다른 정치적 진영에 서 있는 연인 아나톨리와 플로렌스의 선택에는 개연성이 약해 동의하기 어렵고, ‘말’로만 전달되는 체스 경기의 결과에서 프레디의 악랄한 천재성은 발견되기 어렵다. 그 대신 제작사 엠뮤지컬아트는 (이번에도) 다수의 아이돌을 캐스팅해 텍스트 자체보다 아이돌 팬덤의 힘에 의지하고 있다. 이로써 참신한 화성과 멜로디가 사용된 '체스'의 음악은 묻혀 버리고, 정치성을 지닌 뮤지컬은 또 다시 설 곳을 잃는 느낌이다. '데스노트' 역시 다르지 않다. 원작의 방대한 서사를 압축할 때 피하기 어려운 서사의 구멍을 배우들의 실력으로 겨우 극복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페라의 유령'을 타자화하며 재해석된 팬텀을 보여주겠다는 '팬텀' 제작사의 호언장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비애에 찬 유령을 전경화하는 작품의 내용에 따라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이보다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는 클래식 가수들과 김주원, 윤전일 등 유명 발레 댄서들을 기용하여 오페레타에 가까운 ‘명품’을 지향한다는 마케팅 방향이 부각되어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아리랑'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판에 박힌 듯 정형화 되어 있고, 특히 식민지 조선을 ‘짓밟는’ 일본인들은 그로테스크하거나 무식하다. 모든 갈등하던 것들과의 화해를 상징하는 아리랑의 활용법은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다행히, 조명과 영상이 진부함을 상쇄시키고 있으나 '프랑켄슈타인'(2014)의 성공 이후 탄력을 받은 대형 창작뮤지컬 제작의 바람을 강하게 몰고 가기 위해서는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뮤지컬이 민족주의에만 의존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예술은 삶의 세목 중 가장 마지막에 따라 나온다. 적어도 일반 대중이 먹고 사는 문제만큼 절박한 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뮤지컬 시장의 위기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스템의 문제만 거론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되는 것들을 유의미한 작업으로 지속적으로 격상시킬 필요가 있다. 개연성을 갖춘 드라마와 음악이 정교하고 섬세하게 공명하는 작품을 개발하거나 찾아야 한다. 뮤지컬 시장이 화려하게 지속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