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전기연 기자 = 故 박동혁 병장의 담당 군의관 수기가 다시금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 2002년 6월 제2 연평해전이 일어날 당시 국군수도병원 내과 군의관이었던 이봉기 교수는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부상을 당한 오중사를 담당하게 됐다는 이봉기 교수는 제2연평해전에 대해 듣게 돼 충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오중사 맞은편 침상에서 박동혁 병장을 접하게 됐다는 이봉기 교수는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혔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있었다"고 말했다.
출혈이 엄청나서 후송당시부터 쇼크 상태였던 박동혁 병장은 수술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엄청난 외상으로 전신성 염증반응 증후군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내과전공인 자신 또한 박동혁 상병과 인연을 맺게 됐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고 생각했다는 이봉기 교수는 "박동혁 병장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3주를 지내며 더이상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등에 발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인공호흡기도 멈췄고 기도관도 제거해 박동혁 병장은 말을 할 수 있게 됐다"며 호전되고 있었음을 전했다.
하지만 이봉기 교수는 "정신을 차리면서 오히려 군의관들을 힘들게 했다. 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차오르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감을 입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서진 육체로 꼼짝 못하고 누워 흐느끼는 젊은 장정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어쨌든 박동혁 병장은 그렇게 회복해갔다. 그는 부상자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외과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고 말했다.
상태가 나아지는가 했지만, 박동혁 병장이 중환자실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봉기 교수는 "CT를 찍어보니 뇌실질 전반에 걸친 세균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그는 완연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들을 사용해봤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져 무너졌고, 결국 9월 20일 새벽 심장이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여 안타까워했다.
꼭 살리려고 노력했던 이봉기 교수는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고 그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