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최신형 기자 = 한국 정치가 위기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는 간데없고 상대방을 타격해 자신의 존재만 드러내는 ‘하수 정치’만 판치고 있다. 중립국 인도의 초대 총리였던 네루는 “정치란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했건만, 우리 국민의 눈물은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고도의 압축성장에만 매몰된 채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집단가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탓이다. 빈부 격차부터 재난안전시스템 부재까지, 분명 대한민국호(號)는 ‘위험 사회’에 노출돼 있다.
예상대로였다. 거침없었다.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정국 화약고로 떠오른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 등에 대한 해법을 꺼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묘한 사안인 수직적 당·청 관계와 선거구제 개편, 개헌 등 내치는 물론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등 외치까지, 때로는 날카롭게 또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정 부의장과의 인터뷰는 국회 본청 부의장실에서 박원식 아주경제 정치부장 겸 부국장과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입법권, 헌법정신 위배 안 돼”
인터뷰 초반부터 ‘거부권 정국’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정 부의장은 “최근 몇 주 동안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며 “정말 여의도 정치가 마비되는 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때로는 보이는 곳에서 노력했지만 (거부권 정국을 보면서)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운을 뗐다.
본격적인 답변이 이어졌다. 정 부의장은 박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에 대해 “당연한 절차”라며 “이는 헌법과 국민이 보장한 대통령의 권한”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삼권분립 국가로 이를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고, 정치인은 이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더 이상 ‘네 탓이오’는 안 된다. 내일을 향해 가야 할 때”고 강조했다.
그는 국회법 개정안의 핵심 쟁점인 ‘시행령의 수정·변경 요구권’과 관련해 “입법부의 권한 남용이 있는 부분”이라며 “국회의장의 중재안 내용도 ‘행정부 권한 침해 부분을 해소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의견이 다수라는 견해도 있었다”고 밝혔다.
다만 정 부의장은 새누리당이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에 매몰된 나머지, 야권이 세월호법 시행령을 수정하기 위해 행정입법에 대한 국회의 수정 권한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 논란을 간과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5월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28일까지 연금법에 합의하지 못하고 회기를 하루 더 연장해 처리했다”며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시한이 쫓기면서 처리하다 보니까,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일부 위헌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당연한 절차적 행위다. 존중돼야 마땅하다”며 “국회법 해결을 위한 의장단과 여야 지도부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하루빨리 행정부와 입법부 간 논쟁이 아닌 국민을 위한 대안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청, 한배 탄 공동운명체”
질문은 수직적 당·청 관계로 넘어갔다. 거부권 정국에서 박 대통령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배신자’ 낙인을 찍으면서 수직적 당·청 관계 논란이 재부상한 터라 정 부의장이 어떤 대답을 할지 자못 궁금했다.
정 부의장은 “정부와 새누리당은 한배를 타고 있는 ‘공동운명체’”라고 정의 내렸다. 그는 “새누리당은 국정의 공동책임을 지고 있는 여당이 아니냐”라고 반문한 뒤 “당·청 갈등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며 “(역설적으로) 이러한 논의가 있다는 것 자체가 수직적 당·청 관계에서 벗어나 수평적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거부권 정국뿐 아니라 그간 당 주류인 친박(친박근혜)과 비박(비박근혜) 지도부인 K(김무성 대표)·Y(유승민 원내대표) 라인이 사사건건 대립하지 않았느냐’고. 정 부의장은 즉각 “새누리당 내부에 친박·비박 개념이 있기나 하느냐”고 반문한 뒤 “친박이니, 비박이니 하는 것은 언론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지, 당 의원들이나 당원들의 경계를 나눈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유 원내대표를 향해 “호사다마라고 할까, (공무원연금 개혁안과 국회법 개정안의 연계를 하면서) 작은 부분을 놓쳤다. 유 원내대표의 공부가 깊게 안 된 것”이라면서도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히 굳지 않느냐. 그것이 정치”라고 피력했다.
이어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의 18대 대선 경선 당시 80%의 득표율로 후보로 선출된 점을 거론하며 “우리 모두는 박근혜 정권을 만든 사람들이자 현 정권의 성공을 바라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며 “지금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칠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당과 정권의 성공을 바라는 만큼 잘 봉합돼 갈 것”이라고 논란을 일축했다.
그러면서 “지금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다. 당·청이 분열되고 갈등하면 나라는 어려워지고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가게 된다”며 “이럴 때일수록 갈등을 풀기 위해 더욱 소통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월호·메르스, 초기 대응 실패”
인터뷰 중반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정 부의장은 정부의 컨트롤타워 부재를 질타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와 관련, “무사 안일주의는 이번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전제하면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안이하게 대처하다 보니,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고 꼬집었다.
다만 ‘청와대 1차 책임론’에는 선을 그었다. 정 부의장은 “문제가 발생하면, 관계부처에서 능동적으로 초기 대응에 나서야 한다”며 “국민여론이나 청와대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전문가적인 지식을 가진 관계기관에서 선제 대응을 못 한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제2의 세월호 참사를 막는 방안으로 ‘재난 교육훈련의 확대’를 꼽았다. 정 부의장은 “재난은 예고 없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느냐”며 “국민들이 각종 재해·재난에 대처하는 법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평상시 정부와 민간의 협력체계의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이 필수”라고 밝혔다.
비밀 행정주의 논란을 일으킨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서도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며 “확진 환자가 국내에 처음 발생했음에도 메르스에 대한 과소평가로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의 발 빠른 대처가 부족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전염병 관리를 위한 방역 매뉴얼도 초동 단계에서부터 작동되지 않았다”며 “첫 환자가 확진 때까지 열흘 동안 격리 조치 없이 방치됐고,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상황에도 감염자의 소재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정 부의장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정부3.0’이 사실상 무력화된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신속한 정보공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메르스에 대한 의료진의 인식 부족, 응급실의 과밀수용 등 감염예방통제 조치를 최적화하지 못한 것도 주원인”이라고 전했다.
◆“선진화법, 의회민주주의 본질 사라져”
정국의 뜨거운 감자인 ‘국회선진화법’으로 주제를 옮겼다. 정 부의장의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그는 “의회민주주의 핵심은 ‘다수결 원칙’인데, 야당이나 소수 정당에 의해 국회가 좌지우지되고 있다”며 “(선진화법의) 본래 취지와는 반대로 국회 운영에 걸림돌이 되는 법안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선거구제 핵심인 ‘권역별 비례대표’ 도입과 관련해선 “지방의 지역대표성이 사라지게 되며, 지역 균형발전에도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대통령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선 “‘4년 중임제’가 좀 더 바람직한 권력구조라고 생각하지만, 현 상황에서 개헌 논의는 적절하지 않다.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서민경제와 민생정치 회복”이라고 소신을 피력했다.
인터뷰 후반 주 의제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 등 외치였다. 정 부의장은 정부의 외교 정책에서 가장 높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으로 ‘중국 중심주의 외교에서 벗어나 중국·러시아 등으로 외교관계를 확장한 점’을 꼽았다.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는 ‘대북관계’를 들었다.
정 부의장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급부상으로 예전과는 다른 시대로 접어든 것만은 분명하다”며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재균형 정책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 등으로 외교력을 확대하는 전략을 썼다”고 말했다.
아울러 “잠재력이 큰 중국과 경제적·군사적 등 다양한 분양에서 상호 협력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전략으로 외교를 펼쳐나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실리적 외교’를 든 뒤 “대한민국이 북한과의 대화상대에서 우선이라는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주변 강대국들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편, 북한이 대한민국을 배제한 채 국제사회와 대화할 수 없도록 다양한 루트를 통한 국제사회 외교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마지막으로 정 부의장은 “지금 대한민국은 나라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특히 침체된 경제를 살려내는 것은 시급한 과제”라며 “국회 부의장 소임을 맡은 이상 특권의식을 버리고 일하는 국회, 국민의 마음을 보듬는 국회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 나가겠다.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 대담=박원식 아주경제 정치부장 겸 부국장, 정리=최신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