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아픔, 폭력은 배우 김영민의 필모그래피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2001년 ‘수취인불명’ 지흥,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동식, ‘일대일’의 오현을 지나, ‘마돈나’ 상우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궁지에 몰리고 상처 입으며 상처를 주는 인물이다.
16일 아주경제는 영화 ‘마돈나’(감독 신수원·제작 ㈜준필름)의 배우 김영민을 만났다. 필모그래피를 따라 섣불리 짐작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시종 천진하게 웃고, 조곤조곤 답변을 이어나갔다.
‘마돈나’는 마돈나라는 별명을 가진 평범한 여자 미나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그녀의 과거를 추적하던 중 밝혀지는 놀라운 비밀을 담은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극 중 김영민은 마돈나의 생명을 담보로 삼는 냉혈한 재벌 2세 역할을 맡았다.
신수원 감독은 김영민이 걱정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캐치했던 감독이다. 상우를 “입체적 인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대부분 현장에서 이뤄졌다. “밀도 있게 캐릭터를 다루는” 모습을 보고 “감독님이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의 마음을 잊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시나리오에 대한 첫인상은 예리하고, 또 강렬했다. 그는 작품 구석구석에서 묵직한 슬픔과 폭력을 느꼈다.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에 관해 묻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마돈나’의 첫인상을 밝혔다.
“시나리오를 처음 보고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상처나 아픔, 폭력, 생명에 대한 것들이었어요. 가슴이 미어지더라고요. 자본에 의한 폭력을 당하는 인물, 그리고 혜택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슬펐어요. 어떤 폭력들을 당하고 최소한의 모성조차 지키지 못한다는 게 아프더라고요. 이게 정말 실제로 벌어지는 일인 것만 같았어요.”
아직 상우라는 옷을 입기 전이었다. 김영민은 작품 속 여성들에 대한 연민과 상처가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연기해야 할 상우는 “단서를 제공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시선 때문에 인물에 몰입하는 것이 방해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인물에 들어가는 데 방해 받을 것 같았어요. 미나와 해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자꾸 들어서요. 그래서 아예 대본을 보지도 않고 작품이 주는 여러 가지 의미를 먼저 생각했죠. 나쁜 놈을 표현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필요에 의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시나리오 상에 없고 영화에 그려질 건 아니지만) 그의 역사를 써나가려고 했어요. 작품과 연결이 되도록이요. 마치 소설의 독자가 행간을 읽듯, 관객이 상우의 역사를 느껴 주시길 바랐어요. 다른 작품들보다 ‘마돈나’가 유독 더 심했던 것 같아요. 의식적으로 그런 노력을 했어요.”
‘마돈나’ 속 인물들은 진솔하고 제각각의 이유로 삶을 갈구한다. 단순한 악역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김영민은 캐릭터를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촬영을 이어가며 캐릭터에 대한 해석에도 변화가 생겼다.
“찍으면서 상우를 더 잔인하게 연기하게 되더라고요. 혁규(변요한)와의 장면이 대부분 그랬죠. 더 악랄한 방법을 쓰게 되고, 웃게 되고, 갈등하는 해림과 혁규를 보면서 가소로워하기도 하고요. 점점 상우라는 역할에 맞아가는 느낌이었어요.”
김영민이 상우에 완벽하게 밀착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 배우들의 공이 컸다. 해림 역의 서영희를 비롯해 변요한과 호흡을 맞추면서 “눈빛만으로도 아귀가 맞물리는 것” 같았다. 배우들 간의 긴장감이 불꽃처럼 튀었을 때, 서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빠르게 캐치했을 때 “소름이 싹 끼칠 정도”로 쾌감을 느꼈다.
“특히 요한이와 그런 호흡이 잘 맞았어요. 현장에서 생기는 호흡이나, 좋은 장면들은 상대 배우에게서 얻는 게 크거든요. 연기를 잘하는 친구라 마지막 장면 속 희망에 대한 부분도 잘 살렸던 것 같아요.”
김영민은 단순히 악역에 그칠 수 있는 냉혈한 재벌 2세 상우를 “사랑 받지 못하고, 아버지 안에 갇혀 사는” 아픈 기억이 있는 인물로 채웠다. “인간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부여했다.
캐릭터의 전사를 만드는 과정은 치열하고 복잡했다. 관객들이 미나의 과거의 상처, 아픔을 순조롭게 따라갈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상우는 짐작하고 눈치챌 수 있도록 이어붙이고 채워 넣어야 했던 것이다.
“감독님께 감사하죠. 그냥 나쁜 놈으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잘 다듬어주셨고 생각해주신 거니까요. 상우의 나쁜 단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형성한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죠. 그 빈 곳을 채우는 것 또한 배우의 일이고요. 역시 그런 작업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불안하지만 만들어내는 일이요.”
신수원 감독은 김영민에게 신뢰감을 주었고, 그는 그런 감독을 위해 “자신 있게 모든 걸 보여주려” 했다. 그는 이런 힘든 과정들이 “칸에 초청 받은 것으로 보상 받은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
“칸에서 왜 우리 영화를 초청했을까 생각해봤어요. 감독님이 처음 영화를 만들 때 가졌던 마음을, 끝까지 놓지 않은 게 (초청 받은 이유) 컸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의 아픔을 다뤘다는 것, 그걸 한국적인 정서로 녹여냈다는 점이요. 폭력, 낙태, 생명 등 사회적인 문제를 진실 되게 다뤘다는 부분이 관객들과의 소통을 도울 걸로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