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계획이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1월이었다. 김 제1위원장이 오는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식에 참석할 것이라는 이야기였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달 22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외교 담당 보좌관(외교 수석) 유리 우샤코프가 "여러 북한 인사들과의 접촉에서 김정은이 모스크바에 올 것이란 확인을 받았다. 현재 양국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히자 그의 국제무대 데뷔가 현실로 다가오는 듯 했다. 김 제1위원장이 국제무대에 데뷔하면 동북아에 대화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던 일"
중국내 전문가들은 김 제1위원장의 방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를 크게 두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는 우상화된 지도자는 다자무대에 참석하기 쉽지 않다는 것. 북한내에서 신격화되어 있는 김정은 제1위원장이지만, 세계각국의 여러 지도자들이 한데 모인다면, 그는 이들 중 한명에 불과하다. 진징이(金景一) 베이징대 교수는 "모스크바 행사에서 김 제1위원장은 한껏 권위를 드높일 수가 없으며, 이 장면이 북한에 송출된다면 북한 내부에서 그의 권위에 손상이 갈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이유는 북한은 중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중국에 앞서 러시아를 첫번째 정상외교 상대국으로 삼기에는 부담이 컸다는 것. 중국은 UN의 대북제재에 동참하고 있지만 여전히 북한에 식량, 원유를 비롯한 각종 물자들을 유상무상으로 공급하고 있다. 중국을 외면한채 러시아를 상대로 등거리외교를 펼치기에는, 북한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크다. 중국시보는 평론을 통해 "그가 푸틴대통령과 첫번째 해외 정상회담을 강행했다면, 중국과의 관계가 심각하게 손상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이 내민 요구조건 무엇?
중국내 전문가들은 그의 방러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북러 양국이 모두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관련 협상을 진행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협상도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고위급 외교관이 김 제1위원장의 방중소식을 언론에 공개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근거다.
북한이 러시아에게 모스크바 방문의 조건으로 요구했을 사항으로는 ▲핵무기 장거리미사일 등 전략무기 기술 이전 ▲전투기 방공미사일 등 무기도입 ▲식량, 원유 등의 물자지원 등이 꼽힌다. 이정도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김 제1위원장이 경호상의 리스크와 중국 리스크, 권위하락 가능성을 무릅쓰고 모스크바까지 갈 이유가 없다는 게 중국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반대로 이정도 반대급부가 있었다면 방러가 성사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김상순 동아시아평화연구회 회장은 "북한이 러시아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서 협상을 결렬시킨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분석했다. 실제 러시아 극동개발부 장관이 "김정은의 방러불발이 북러 양국의 경제협력에 영향에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 역시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북러 모두 '남는 장사'
김 제1위원장의 방러가 무산됐지만, 북러 양국은 이를 통해 소기의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선 북한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존재감을 전세계에 다시 한번 과시했다. 북한 정권기반이 안정돼 있음을 내세우고, 그가 언제든지 전세계 뉴스의 중심에 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또한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모스크바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정중히 거절했다"라는 메시지를 중국에 보낼 수 있다. 이와 함께 미국에는 "크리미아를 병합한 러시아의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제스춰를 취할 수도 있다. 국제사회에 고립을 타개하고 싶다는 분명한 메시지도 냈다. 이밖에도 북측이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성실한 태도를 보였다면 향후 러시아와의 경협확대에도 유리하다.
러시아 역시 성과가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서방세계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러시아는 김정은 초청을 통해 자국이 동북아 평화정착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부각시킬 수 있다. 또한 김 제1위원장 방문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모스크바에서 개최될 승전기념식이 자연스레 전세계에 홍보됐다.
판다웨이(潘大渭) 상하이사회과학원 러시아연구센터 주임은 "이번 사안 이면에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외교경색국면을 타개해야 할 러시아와, 전통적 우방인 중국과도 껄끄러운 외교고립국면을 풀어내야할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