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오세암’(감독 박철수), ‘첫사랑’(감독 이명세), ‘닥터 봉’(감독 이광훈), ‘YMCA 야구단’(감독 김현석)으로부터 ‘얼굴없는 미녀’(감독 김인식), ‘타짜’(감독 최동훈), ‘바람 피기 좋은 날’(감독 장문일), ‘이층의 악당’(감독 손재곤), ‘도둑들’(감독 최동훈), ‘관상’(감독 한재림)까지 다양한 장르에 다채로운 역할들로 대중을 만났다. 지난달 29일 개봉한 ‘차이나타운’(감독 한준희·제작 폴룩스픽쳐스)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캐릭터는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깬, 김혜수의 도전과도 같은 작품이다. 최근 서울 팔판동 카페에서 만난 김혜수는 “도전하고 싶은 욕망”을 작품 선택의 최우선 기준으로 꼽았다.
“시나리오가 중요하지만, 도전해 보고 싶은 욕망이 가장 중요하죠. 무언가를 해 볼 가능성이 있고 용기를 내볼 만한 그런 작품을 기다리고 만났을 때 참 좋은 것 같아요. ‘차이나타운’은 캐릭터의 무게감 때문에 큰 부담이 있었지만 그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었죠. 영화의 내용을 떠나 ‘엄마’ 역은 배우로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였어요. '엄마'는 말 그대로 엄마가 아니라,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엄마는 일영을 비롯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아이들을 거둬들이고 식구를 만들어 차이나타운을 지배한다. 엄마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아이로 자란 일영은 어느날 엄마의 돈을 빌려 간 악성채무자의 아들 석현(박보검)을 만나면서, 냉혹한 차이나타운과 달리 따뜻하고 친절한 세상을 알게 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관객이 엄마를 처음 봤을 때 자기 새끼를 벼랑에 던져버리는 사자와 같은 느낌을 받길 바랐어요. 그게 엄마의 방식이고, 차이나타운의 방식인, 엄마가 차이나타운 전부를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더 엄마에 대해 부담을 느꼈어요.”
내년이면 30년 차인 베테랑 배우로서의 고뇌가 느껴졌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숙인만큼 낟알이 촘촘히 달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혜수가 롱런할 수 있는 비결과 같다.

“(웃음) 솔직하게 말하면 제 걱정 하기도 바빠 다른 사람 걱정할 여유도 없었어요. 평소엔, 초반에 불안하거나 걱정하기도 하죠. 이번에는 그런 걱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어요. ‘나만 잘하자’라는 생각으로 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부담들이 사라지더라고요. 감독님과 대화를 나눠 보니 명확해졌죠. 사실 한준희 감독님과는 첫 작품이라 사전에 얘기를 해도 잘 모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현장에서 보니 굉장히 침착하고 친절하고 명확하시더라고요, 판단부터가요. 어떤 상황에서 이끌어야할 것들을 정확하게 알고 운영하는데 첫 장편 데뷔하는 감독님들이 전부 그렇지는 않거든요. 안정적이었죠. 촬영 중에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데, ‘믿고 싶은 것’과 ‘믿는 것’은 다르잖아요.”
“김고은은 정말 좋은 배우죠. 굉장히 많은 것들을 고루, 조화롭게 갖춘 준비된 배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많이 뻗어나갈 가능성이 크죠. ‘차이나타운’에서 거칠고 힘든 캐릭터인 일영을 정말 잘해 냈어요. 배우들이 자기만의 색을 강화하면서 넓혀가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김고은은 풍성하고 훌륭한 배우로 성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의 입장에서도, 관객의 입장에서도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배우를 얻은 거죠. 고경표는 자신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더라고요. 엄태구는 드라마틱한 마스크에 멋진 보이스를 갖고 있고요, 우곤이라는 역할이 말보다 동물적으로 반응해야 하는데 제격이었죠. (저능아 캐릭터) 홍주로 등장하는 조현철은 잘해도 튈 수밖에 없는 역할을 너무나도 잘했죠. 장편 경험이 없다고 들었는데 아주 특별한 느낌의 새로운 배우를 얻은 것 같아요. 감독님이 적임자라고 생각해 캐스팅을 했을 텐데, 보통 다른 ‘키’(Key)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뚝심대로 캐스팅 하고 조율하면서 배우가 제 역량을 발휘하게 한 감독의 역량이 제일 컸다고 봅니다.”
김고은의 어린 시절 역할에는 아역 김수안이 캐스팅됐다. 김혜수의 말을 빌리자면 김수안은 ‘아역 이상의 힘’을 가진 ‘배우’였다. 연기를 하지 않을 때면 영락없이 아기인데, 연기를 시작하면 ‘아역’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고.

“여성이 주체라는 게 가장 흥미로웠죠. 권력 중심에 여자가 있다는 것도 그랬지만 개인적으로 느와르를 좋아하기도 해요. 여성 위주의 영화가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전면에 나서지 않더라도, 어떤 장르건 여배우가 강렬한 인상을 남길 캐릭터가 부족했죠. 천만영화가 많아지고 영화를 보는 인구가 많아진 것 같긴 한데 실제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다양성은 줄어든 것 같아요. 작은 영화들도 개봉을 하지만 폭넓게 볼 수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공식화된 캐릭터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고민은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여성이 주체라기보다는 영화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캐릭터로서 다양한 여성이 등장하길 바랍니다.”
한국만 여성 중심의 영화가 적은 건 아니다. 상업성을 최우선으로 하다 보면 남성 위주의, 히어로가 주인공인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고 김혜수는 말한다. 살아 움직이는,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제시된다면 여배우가 실력을 발휘할 만한 여지는 충분하다는 게 김혜수의 생각이다. “남성 배우 투톱에 기능적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아닌, 입체적 여성 캐릭터가 자주 나오길 바란다”고 말하는 눈빛에서 후배 여배우들을 위한 진심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