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되는 고용시장] "10년째 차장이라 행복해요"...승진이 두려운 중년 남성들

2015-01-2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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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임이슬 기자]


아주경제 김부원 기자 = # IT업체에서 근무하던 최모(46)씨는 팀장까지 고속 승진했지만 임원 승진에서는 탈락했다. 더군다나 회사가 구조조정을 예고하자 최씨는 울며 겨자 먹기로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남들 못지 않은 경력도 있으니 재취업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큰 착각이었다. 1년이 넘도록 20여곳의 회사에 이력서를 냈지만 그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그동안 모은 돈과 퇴직금으로 겨우 가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눈칫밥을 먹는 기분이다. 언제 재취업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가족을 부양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 외국계 대기업에 근무하는 전모(52)씨의 직급은 10년째 차장이다. 종종 지인들이 "경력과 나이를 감안하면 당연히 진작에 부장으로 진급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지만 전씨는 차장 직급에 머물러 있는 게 나쁘지 않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회사의 인력 구조가 이런 식으로 형성돼 있을 뿐이다. 신입채용 규모를 줄이고 승진 시기를 늦추는 대신 기존 직원들이 오래 근무할 수 있도록 인사 시스템을 바꿨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딸이 올해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에 전씨 입장에서는 회사에 오래 머무르는 게 승진보다 중요하다.


중장년 남성 직장인들이 승진에 기뻐한다는 것은 옛말이 됐다. 오히려 승진이 조금 늦더라도 회사에 오래 다니는 게 절실해졌다. 퇴직 후 재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창업 전선에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22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최근 몇년 간 업계 전반적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지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그만 둔 중년 남성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실직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함께 심한 경우 가정 파탄은 물론 극단적인 선택으로까지 몰고갈 수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승진이 웬말입니까"…오래 근무하는 게 최고

"임원승진이 웬말입니까. 임원되면 머지않아 회사 그만두라는 얘긴데, 되도록 오래 다녀야죠."

한 시중은행의 부장은 "임원 승진하셔야죠"라는 인사말에 크게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답했다. 

최근 수장이 바뀌면서 임원진도 대폭 교체됐던 한 공기업의 임원은 "이번에 퇴직한 임원들 중 아직 자녀들이 대학생이거나 미혼인 경우도 있어 안타깝다"며 "재취업이 쉽지 않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이같은 고충은 최근 내로라하는 기업의 임원들과 대화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중장년들이 현재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회사를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보란 듯이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나오는 상상을 하지만 재취업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쉽사리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일이다. 중장년층은 더욱 그렇다.

중장년층의 실직과 재취업 실패는 가정불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심각하다. 얼마 전 서울 서초동에서 발생한 부인과 두 딸을 살해한 사건도 가장의 실직과 주식투자 실패 등에서 비롯된 참극으로 알려졌다. 수년째 재취업이 안된다는 이유로 술에 의존해 살던 한 가장은 부인이 홧김에 자신의 따귀를 때리자 경찰에 신고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다보니 우울증에 시달리는 중장년 남성들도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3년 국내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은 남성 환자는 총 20만 8756명이었다. 5년 전보다 3만9576명 증가한 규모다. 2013년 기준 연령대별 남성 우울증 환자 분포는 50대가 20.6%로 가장 많았다. 이어 70대 이상 20.2%, 60대 16.4%, 40대 15.9%, 30대는 10.8% 순이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13년 한해 동안 50대 남성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58명으로, 전년(53.2명)대비 8.9% 증가했다. 우울증을 앓는 남성이 많아진 이유는 직장생활의 스트레스가 과거보다 심해진 탓으로 풀이된다.

◆"재취업 서비스 마련돼야"…창업도 쉽지 않다

청년 취업만이 문제가 아니다. 중장년층 역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둔 뒤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재취업을 시도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부족한 것이 더욱 문제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40대 이상 회원 40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96.8%가 '중장년 재취업을 돕는 서비스가 충분하지 않다'고 답했다. 응답자 중 45.2%는 '취업 준비 중'이라고 답해 직장인(33.7%)보다 많았다.

재취업에 있어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물은 결과 응답자들은 △중장년 채용 박람회가 더 열렸으면 좋겠다(52.9%) △유망 업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13.6%) △실제로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10.4%) 등으로 답했다.

취업에 있어서 느끼는 어려운 점은 △나이 때문에 직장에서 환영받기 어려울 것 같다(41.4%) △40대 이상이 취업할 곳이 적은 것 같다(37.2%) △근무 환경이나 보수가 만족스럽지 않다’(10.7%) △채용 공고를 발견하기 어렵다(5.0%) 순이었다.

윤기림 리치빌재무컨설팅 대표는 "재무설계 상담을 받으려는 중장년 고객 중 상당수가 실직이나 재취업 실패로 고민하는 분들"이라며 "재취업이 안되면 결국 창업으로 눈을 돌리는 데 창업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창업지원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어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창업 후 마케팅 등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는 점을 정부가 고려해야 한다"며 "중장년과 은퇴자 등에게 최고의 재테크는 재취업이므로, 재취업을 지원하는 여러 지원책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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