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김근정 기자 = 600여년 전 티베트 불화, 탕카(唐卡)가 지난해 중국 예술품 중 최고가인 2억7490만 위안(약 487억7000만원)에 낙찰됐다. 명나라 영락제(재위 1402∼1424) 시대에 제작된 해당 탕카는 홍콩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중국 상하이 금융재벌이자 베이징과 홍콩 미술시장의 ‘큰 손’, 류이첸(劉益謙)의 손에 들어갔다.
중국 대표 영화사이자 최근 종합 엔터테인먼트사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화이브라더스(華誼兄弟) 왕중쥔(王中軍) 회장도 세계적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거액에 낙찰받았다. 작품명 ‘데이지와 양귀비꽃이 담긴 병’은 지난해 11월 뉴욕에서 개최된 소더비 경매를 통해 결국 왕 서방의 품에 안겼다. 낙찰가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6180만 달러(약 670억6000만원)였다.
△ 폭발적 성장 후 조정기, ‘뉴노멀’ 시대 진입하나
이처럼 각 분야 시장의 ‘큰 손’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 부호들의 거액 낙찰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1년부터다.
당시 중국 근대문인화가인 치바이스(齊白石, 1863~1957) 의 그림,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ㆍ100×266㎝)’가 중국 자더(嘉德) 경매에서 무려 4억2550만 위안(약 742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는 중국 회화 사상 역대 최고가다.
산수화가 리커란(李可染ㆍ1907~1989)의 1964년대 작품인 ‘만산홍편도(萬山紅遍圖)’도 이듬해인 2012년 2억9300만 위안에 낙찰되며 중국 시장의 잠재력과 중국 부호의 놀라운 자금력에 세계적인 관심이 쏠렸다.
중국 예술품 시장의 확대는 초고속 경제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거액을 선뜻 예술품에 투자하는 거물급 큰 손이 급증하고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예술품에 대한 수요도 따라 불어난 것이다. 매머드급 아트페어 조직 TEFAF의 지난해 '세계 예술품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에 중국은 시장점유율 24%로 2년 연속 예술품 시장 세계 2위에 이름을 올렸다. 38%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이 1위, 3위는 점유율 20%의 영국이 차지했다.
‘세계 2위의 예술품 시장’, 화려하고 거대한 느낌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기대와는 조금 다른 그림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중국 경매시장은 2011년 폭발적 성장 후 거품이 빠지고 각종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조정기, ‘뉴노멀’ 시대를 맞고 있다.
지난해 중국 예술품 시장 5대 경매업체인 국내 중국자더(中國嘉德), 베이징바오리(北京保利), 베이징쾅스(北京匡時)와 해외업체인 홍콩소더비, 홍콩크리스티의 춘계 예술품 경매 거래액도 큰 폭으로 감소했다. 가장 호황기로 언급되는 2011년 춘계 경매 대비 무려 46% 급락하며 반토막이 난 것이다.
중국 경매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9월 중국 예술품 경매 거래액은 총 153억 위안(약 2조6700억원)으로 2013년 총 거래액인 313억8300만 위안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쳤다. 지난해 12월 18일 기준 예술품 거래량도 전년 동기대기 18.26% 감소했다. 500만 위안 이상 고가 경매품 거래량도 전년 동기대비 16.17% 줄었다.
이에 따라 2011년 이후 엄청난 낙찰가를 보이며 중국 경매시장의 호황을 이끌었던 중국 유명화가 장다첸(張大千1899~1983), 치바이스 등의 작품 가격도 절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장다첸의 경우 작품 낙찰가가 2011년 30x30cm 당 101만 위안(약 1억7700만원)에 육박했지만 최근에는 49만 위안 수준까지 하락했다. 치바이스의 작품도 최고 125만 위안에서 2014년 76만 위안으로 50% 가량 가격이 떨어졌다.
보다 구체적인 사례도 있다. 쉬베이훙(徐悲鴻 1895~1953)이 평생 단 두 점 남긴 ‘동물십이생초(動物十二生肖·십이지)’ 중 한 작품이 2007년 무려 7280만 위안(약 127억원) 가격으로 낙찰됐다. 그러나 지난해 경매에 부쳐진 나머지 한 작품의 낙찰가격은 4600만 위안으로 반값 수준이었다.
△ 문화적 소양, 경매 예술품 다양성 부족 등 원인
중국 국내 예술품 경매시장이 위축되고 조정기를 맞은 이유로는 중국 경기 하방압력, 시진핑(習近平) 신지도부 집권이후 강력해진 반부패 바람 등 영향으로 수요가 감소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업계 전문가들은 이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분석한다.
베이징 경매업체인 룽바오(榮保)의 류샹융(劉尙勇) 대표는 “현재 중국 예술품 경매시장에 매력적인 작품, 돈, 신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예술품에 대한 이해와 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현재 중국 상당수 부호들은 부(富)에 대한 과시, 돈세탁, 투자 등을 목적으로 예술품 경매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부호의 예술품 경매를 향한 시선이 국내가 아닌 해외시장에 쏠려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 외에 커지는 시장 파이만을 노린 무분별한 시장 진출에 따른 출혈경쟁과 경매품이 서화(書畵)에만 국한된 것도 시장 위축의 이유로 지적됐다.
현재 중국 대형 경매업체가 다루는 예술품 중 70%가 서화다. 중소업체 시장의 경우에는 그 비중이 90% 이상에 이른다.
중국 부호, 컬렉터들의 해외시장 진출은 빠르게 늘어나는 반면 해외 ‘큰 손’의 중국 시장 진출은 드문 것도 시장 발전을 제한하고 있다. 소더비 통계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서양 예술품 경매에 참여한 중국 국적인은 54% 급증했다. 2012년의 경우 중국 국적인 530명이 총 3억7800만 달러어치의 서양 예술품을 낙찰받았다.
그러나 2013년 중국 예술품 거래의 글로벌 시장 비중은 4%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90%가 중국 베이징과 홍콩에서 낙찰됐다. 이는 당국이 중국 중요 예술품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고 있는데다 중국 예술품이 해외 예술품 수집가의 구미를 당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 시장잠재력 여전히 무한, ‘중산층’이 키워드
하지만 업계는 중국 예술품 경매시장의 전망을 여전히 낙관하고 있다. 경매업계 관계자들은 현재 중국 예술품 경매시장이 경제성장률, 증시 등과 비슷한 궤도를 그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 경제는 초고속 성장 후 중고속 성장을 의미하는 뉴노멀 단계에 진입한 상태다. 중국 당국은 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양적성장 보다는 질적성장을 추구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중국 증시도 최고조에 다다른 후 폭락, 오랜기간 조정기를 거치다 지난해 반등에 성공했다.
향후 중국 경매시장의 키워드로는 ’중산층’이 꼽히고 있다. 여기다 시대적 트렌드인 온라인화도 생각해볼 만 하다.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하고 있는데다 중산층 증가 속도도 여전히 빠르다.
중국 경제성장률이 둔화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세계 평균을 몇 배나 웃돌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호는 물론 ‘돈 좀 있는 중산층’도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포브스 통계에 따르면 재산 1억 달러 이상의 중국 억만장자는 6만4500명, 백만장자는 96만명에 이른다. 연간 소득수준 1만 달러 이상 중산층 인구도 5억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2013년 중국 포털업체 소후닷컴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계소득 1만~10만 달러의 중산층 중 89%가 예술품을 구매할 의사가 있다고 답변했다. 68%는 소득의 10%를 예술품 구입에 쓸 의향이 있다고 밝혔으며 이중 8%는 소득의 30%까지 지출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주목됐던 '고가' 시장의 비율을 줄이고 '중저가' 예술작품을 온·오프라인 경매거래 플랫폼을 통해 '중산층'에게 판매한다면 시장의 발전잠재력은 여전히 엄청나다는 평가다. 부유층만이 향유하는 상류문화가 아니라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고 거래할 수 있는 '일상화' '보편화' 된 시장, 중국 예술품 경매시장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