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은 과거 지(濟)강의 남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강은 중국 황허(黃河)·창강(長江)과 함께 4대 강 중 하나로 꼽힌다. 이후 본래 허난(河南)성 지위안(濟源)에서 발원해 산둥성을 지나 발해만으로 흘러들어갔지만 훗날 황하가 강줄기를 북쪽으로 틀면서 황하와 합쳐졌다.
4대 강이 흐르던 지역인만큼 지난엔 유난히 물이 많아 예로부터 ‘샘의 도시(泉城)’로 불렸다. 과거 지난 일대에는 72개 유명한 샘이 이었다고 전해진다. 지난의 표돌천(趵突泉)은 ‘천하제일천’이라 불린다. 청 나라 건륭제가 이곳의 샘물로 차를 끓여마신 후 물맛에 반했다 하여 붙여졌다.
산둥성은 오늘날 치루(齊魯) 지역으로 불린다. 춘추전국시대 제(齊)·노(魯) 나라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제 나라 옆에 있던 노 나라는 공자의 유교문화를 낳은 곳이다. 지난에서 100㎞ 정도 떨어진 곳에 바로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가 있다. 산둥성 지역 자동차 번호판의 지역표시 글자가 '노(魯)'인 것은 바로 노나라 영향을 받은 탓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공부가주(孔府家酒 공자 후손의 술)와 삼공맥주((三孔 공묘(孔廟)·공림(孔林)·공부(孔府))는 모두 바로 공자 마케팅으로 성공한 취푸 특산 술이다.
지난은 삼국지연의 속 조조가 한때 다스렸던 땅이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은 조조는 황제로부터 제남의 승상 직을 하사받았다. 조조의 둘째 부인 변씨 역시 지난 출신이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기 지난은 한때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수당시대에는 불교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당대 이백(李白), 두보(杜甫)가 모두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었다.
금 나라 때 지난 북쪽에 바다까지 이어지는 소청하(小靑河)를 뚫으면서 지난은 중국의 소금 집산지로 번성하며 지역 경제는 활황을 띠었다. 청나라 말기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가 싹 트기 시작했다. 1904년 위안스카이의 제안으로 지난은 중국 근대 역사상 최초로 외세 개입 없이 자주적으로 외국과 제일 먼저 통상한 항구가 됐기 때문이다.
또 서구 열강의 침입은 오히려 지난 지역경제 발전을 촉진했다. 서구 열강에 의해 지난~칭다오를 잇는 자오지(膠濟) 철도에 이어 톈진(天津)에서 장쑤(江蘇)성 푸커우(浦口)에 이르는 진푸(津浦)철도가 개통되고 황하대교까지 완공되며 지난은 중국 남·북을 잇는 교통 허브로 자리잡았다. 이곳에선 방직·의복·제분·시멘트·성냥 등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중국 비단의 대표적인 전통명가 루이푸샹(瑞臘祥)을 만든 맹자의 후손 맹락천(孟洛川)도 바로 지난 출신이다.
오늘 날 지난은 명실상부한 산둥성 성도이지만 다른 성과 달리 '경제수도'는 아니다. 이미 연해지역의 칭다오나 옌타이에 경제중심 도시 자리를 빼앗긴 지 오래다. 2013년말 기준 지난시 지역 GDP는 5230억1900만 위안으로 산둥성 칭다오(8006억6000만 위안), 옌타이(5613억 위안)에 이은 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시는 오늘날 ‘녹색 GDP’를 외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현재 지난시 지역경제 발전을 견인하고 있는 곳은 지난 치루(齊魯)소프트웨어산업단지다.
치루소프트웨어단지는 중국 4대 소프트웨어산업 개발 중심 중 하나다. 지난 1995년 11월 설립돼 1997년 3월 국가과학기술부의 하이테크산업 발전 프로젝트인 ‘횃불계획’에 의해 소프트웨어산업단지'로 지정된데 이어 2001년 국가정보산업부에 의해 '국가급'으로 격상됐다. 지난 2000년부터 수년간 매년 50%씩 성장했다. 현재 총 6.5㎢ 규모의 치루소프트웨어단지엔 총 1350개 기업이 입주해 7만명이 일하고 있다. 2013년 총 수입이 962억 위안으로 이중 소프트웨어산업 수입만 715억 위안에 달했다. 산둥성 대표 IT 전자기업인 랑차오(浪潮), 중촹(中創), 하이신(海信), 하이얼(海爾) 등도 모두 이곳에 입주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