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1993년부터 2012년까지 약 20년동안 중국삼성의 대관업무를 총괄했던 인물.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코닝, 삼성전기, 삼성중공업, 삼성SDI, 호텔신라 등 삼성그룹 관계사들의 중국진출 과정에서 첨병역할을 맡았던 인물. 삼성그룹의 중국투자 과정에서 벌어졌던 거의 모든 대정부 협상에 참여하고 이를 주도했던 인물. 한국인으로서 가장 넓은 중국 '꽌시'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지목받는 인물. 류재윤 전 중국삼성 상무에 대해 쏟아지는 평가들이다.
류 전 상무는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 협상스킬 등을 집대성해 '지금부터라도 중국을 공부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지난 7월 출간했다. 삼성그룹에서 퇴직한 후 베이징대 사회학 박사과정 졸업을 앞두고 있는 저자를 베이징 모처에서 만났다. 중국인과의 협상스킬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자가 말한 중국인들과의 협상포인트를 7가지로 정리해 본다.
◆명분을 만들어라
저자는 "이 경우 C서기가 A의 투자계획을 받아들인다면 다른 관료들로부터 'C서기가 A를 감싸고 도네'라는 뒷말을 들을 수 있고, B시로부터 'C 서기가 B시의 사업을 가로채가려 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며 "C서기가 입장이 난처해지면 여기저기 손을 쓸 공간이 줄어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꽌시만 믿고 무턱대고 덤비기보다는 C서기에게 명분을 만들어줘야 했다"고 진단한다.
그는 과거 경험담을 털어놨다. 삼성그룹의 한 계열사가 중국에 공장을 짓고자 했지만 이 아이템은 추가 공장신설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열심히 중국 관료들을 접촉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허가해주고 싶지만 규정상 불가능하다"였다. 우여곡절끝에 노후한 공장을 개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자는 안을 냈다. 중국정부가 삼성의 투자안을 지지할 명분이 생겼다. 결국 이 계열사는 노후 공장과 합자형식으로 중국에 진출했으며, 공장을 신설하는 효과를 거뒀다. 이러한 명분은 우리가 찾아내어 줄 수도 있고, 또는 중국의 친구들이 훈수를 두기도 한다.
◆힌트를 읽어내라
중국 관료들과 협상이 잘 진행되다가 난관에 봉착했다. 협상에 전혀 진척이 없고, 입장변화의 이유조차 알 수가 없는 상황. 이같은 상황은 중국사업에서 비일비재다. 저자는 "누구든 원칙상 양보를 해야하는 시점인데도 양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며 "중국인들은 직접 말하기 보다는 선문답식의 힌트를 준다"고 조언한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 협상파트너를 만나게 되면, 이 상대방은 반드시 힌트를 가지고 협상파트너를 만나러 나온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두시간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간에 덕담과 농담만 건네다가 끝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덕담과 농담속에 힌트가 숨어있다. 저자는 "과거 한 관료가 식사를 하고 헤어지면서 내게 '삼성의 설비효율이 뛰어나다'라는 단 한마디의 말을 건넸었다"며 "이는 신청한 공장의 캐파가 크다는 뜻이었고, 캐파를 줄여서 재신청하자 협상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힌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중국인들의 화법을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국인이 거절하는 방법
한참을 대화한 후에 중국인이 환한 표정으로 "이틀뒤에 다시 이야기해보자"라고 말을 끝맺었다. 이틀뒤에 결정하겠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이는 사실상 거절의 의사표시다. 이 경우 2일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답이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두명의 고위층이 대화하다가 한국측 고위층이 중국측 고위층에 예정에 없이 무엇인가 부탁을 했고 중국측은 "좋다. 문제없다"고 답했다. 한국의 고위층은 이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회담장을 떠나겠지만 이를 승락의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중국측이 한국측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면전에서 거절을 하지 않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국인은 본인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도 싫어하지만, 본인으로 인해 상대방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도 싫어한다"며 "표면적으로 승락을 했지만 거절의 뜻인 경우가 많으니 상황을 잘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같은 화법이 거짓말인지 아니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인지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겠다"면서 "중국인의 거절을 승락으로 잘못 오인해 벌어지는 시행착오들이 많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중국인의 거절을 잘 읽어내기 어렵다면, 중국전문가나 중국인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많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국시장에 진출하고 싶어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자칫 함정에 빠지지 않을까, 투자금을 어이없이 다 날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저자는 "돌다리가 있다고 치자. 돌을 밟으면 길이고, 물을 밟으면 함정이다"라며 "중국전문가 혹은 중국인 친구들이 가르쳐주는 돌을 밟아나가면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이 대목에서 "속아넘어가는 것은 두가지 경우가 있다"며 "한가지는 사기꾼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본인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것"이라고 힘을 줬다. 이어 "내 경험상 자신이 들은 이야기, 자신이 본 광경을 맹신한 채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선물은 어떻게 줘야하나
중국인들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할지는 중국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늘 고민이다. 만약 장관급에게 선물을 하려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까. 저자는 "상대방이 장관급이라면 번거롭지만 여러 단계를 거쳐서 선물하는 것이 베스트 솔루션'이라며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
우선 장관의 비서에게 선물을 한 후 장관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할지를 물어본다. 그리고 그 부서의 친한 처장을 만나 선물을 주고 상급 국장에게 어떤 선물을 할 지를 물어본다. 이후 처장이 일러준 선물을 국장에게 선사하며 장관에게 어떤 선물을 할 지를 물어본다. 이 자리에서 국장 뿐만 아니라 배석한 처장에게도 작은 선물을 건넨다. 비서의 말과 국장의 말을 종합해 장관의 선물을 결정한 후, 장관을 만나 그 선물을 건넨다. 역시 이 자리에서도 배석한 국장과 비서의 선물을 건넨다.
이같은 과정을 거친다면, 장관의 마음도 흡족할 것이며, 비서, 국장, 처장의 마음도 살 수 있다. 그는 "비서나 처장, 국장들이 몇년 후면 더 큰 인물이 되어 있을 것이니, 한 순간의 수고스러움과 번거로움은 미래에 충분히 보상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만디 중국인?
한국인들에게 중국인들과의 협상은 인내심을 요한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에 성질급한 한국인은 제 풀에 악수를 두고마는 경우도 있다. 느긋한 한국인이라도 서울 본사로부터 걸려오는 독촉전화에 평정심을 잃어가고 협상에서 수세에 몰린다.
이에 대해 저자는 "중국의 시간을 이해해야 한다"며 "우리나라 협상팀이 1달을 예상하고 협상에 임한다면, 중국팀은 3달을 예상하고 협상시간표를 짠다"고 말한다. 중국이 느린 것은 '우리 생각보다' 늦을 뿐, 중국의 시간표로 따지면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항상 느리지는 않다고 한다. 그는 "만약 마음을 터놓는 친구와 협상한다면, 협상은 하루면 끝난다"면서 "그 다음날부터 협력이 진행되지만 계약서는 한참 나중에 쓰는 경우도 많다"라고 말한다. 계약내용보다 계약당사자가 중요할 수 있는 사회가 중국이라는 것이다.
◆중국인과 친구가 되라
그의 협상기술에 대한 조언들은 어떻게 보면 '중국인과 친구가 되어라'라는 명제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어찌보면 뻔한 이치지만, 마음을 열고 중국인들을 사랑과 애정으로 대하고 그들을 존중하고 이해한다면 중국인들도 마음을 열 것"이라면서 "흉금을 터놓고 조언을 구할 중국인 친구들이 많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중국 협상가"라고 말한다.
끝으로 저자는 "그들과 장기간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며 신뢰를 쌓아간다면 그만큼 중국인 친구들은 많이 생길 것"이라며 "이 친구들은 중국에서의 인생과 사업에 천군만마와 다름없는 힘이 되어줄 것"이라고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