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어?". 미술애호가들은 서울 인사동 선화랑을 지나가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다. 미술시장에서 유명한 설악산 작가 김종학 화백 그림인듯 해서다.
하지만 정작 화랑안으로 들어와 직접 본 그림은, 그게 아니다. 두터운 아크릴물감이 칠해져 야생미가 넘치는 김종학 화백의 그림과 달리 이 그림은 정 반대다. 스미듯 번지고, 엷은 듯 두꺼워 보이면서 오랜 세월을 거친듯한 얼큰한 정감이 묻어난다.
20일부터 전시를 연 작가를 만났다. 알고보니 '수채화 대가'로 불리는 정우범(68)이다. 선화랑에서 9년만에 개인전을 연다고 했다.
"한 5년전인가, 누군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듣고, 그 그림을 봤지요. 같은 야생화를 그렸지만 제 작품은 완전히 다릅니다."
'차별화가 생명'인 화가들에게 '누구와 닮았다. 비슷하다'는 말은 폭력과 같다. 하지만 정 화백은 개의치 않은 듯 했다. "자신의 작업은 다르다"는 확신에 찬 자신감을 보였다.
"제 작품은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반복입니다."
정 화백의 작품이 오랜세월을 간직한 듯 보이는 이유다. 겉도는 물감을 닦아내거나 물감을 여러번 덧칠하는 자칭 '플러스 마이너스' 작업을 통해 그의 화면은 투명하면서도 깊은 색감을 발산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가 고안해낸 'Stroke'(빠른 붓 놀림으로 문지르기) 기법이 무기다. 수제로 만든 고급수채화용 종이(Arches)를 물에 적시고, 예리하고 탄력이 있는 갈필붓(작가가 거칠거칠한 유화 붓을 짧게 잘라 만든 것) 끝에 안료를 발라 툭툭 치면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때 색은 벌어진 종이의 흠으로 스며들고, 종이가 마를 때 틈새가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착색되어 굳어진다. 작가는 이것을 “색을 종이의 모세혈관까지 침투시키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대부분 수채화가 맑고, 투명한 느낌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우범의 수채화는 마치 유화를 쓴 것과 같이 색의 밀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변색되거나 탈색되지 않는게 비법이다.
그렇다보니 "그의 수채화는 종이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가벼움에서 벗어나고 있다. 수채화는 가벼운 그림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깨뜨리고 있다."(신항섭 미술평론가)
이같은 정화백의 수채화 기법은 세계 어느 누구도 하지않는 제작방식이다.
40대 초반 "그림만 그리고 살겠다"고 선언한뒤, 잘나가던 광주교대부속 초등학교 선생직을 그만두고 5~6년간을 골방같은 작업실에 쳐박혀 연구개발해낸 비법이다.
미술대학출신도 아닌 그가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후 제일먼저 한건 시간과의 싸움. 미대출신이 4-5시간을 그린다면, 그는 10~15시간 그리며, 절치부심했다.
'기회는 준비된자에게 온다' 90년대 후반은 그의 인생이 가장 찬란했던 시기다. 국내화단의 독보적인 '수채화 작가'로 스타작가로 등극했고, 국내외 화랑들의 러브콜도 잇따랐다.
선화랑과의 인연도 1997년에 시작됐다. 고 김창실 사장이 직접 광주 작업실로 내려와 작품을 선정해 그해 곧바로 전시가 열렸다. 서울 유명화랑에서 전시는 날개를 달아줬다.
화가의 성공도 인맥이 좌우한다. 정 화백은 "나는 운좋은 사나이"라고 했다. 불안하고 암담했던 시기, 선물처럼 고마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우연히 친구의 집에서 그림을 봤다며 만난 이기정씨는 알고보니 '태권도 박사'였다. 이 박사와의 인연은 미국 올란도시티갤러리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여는 기회가 됐다. 또 당시 금호재단 이강재 부이사장과의 만남은 정화백을 다시한번 광주미술계에 부각시키는 역할도 했다. 술자리에서 만난 이 이사장은 그의 그림을 본후 푹 빠졌다. 당시 '금호문화'월간지에 나오는 '표지 그림' 1년치를 정 화백이 그리라고 맡긴 것. 주위의 질시가 시작됐고, 그는 스타작가로 일약 도약했다.
최근 정화백은 또 다른 기쁨에 붓을 놓지않고 있다. 중국 대만 손문미술관에서 초대전 제의가 온것.
"미술평론가 신항섭씨가 저를 '국내 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작가'라고 소개하더군요. 부끄럽기도 했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춘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무색하지 않게 더 많이 그리고 더 많이 노력할 겁니다. 저는 분명히 우리나라 미술사에 남을 작가입니다." (손문미술관 전시는 내년 5월경으로 잡혔다.)
선화랑에서 열고 있는 이번 전시 타이틀은 '환타지아'다. 위아래도 없고, 왼쪽 오른쪽없이 화면에서 자유분방하면서도 진한 야생화를 그린30 여점을 선보인다. 이 중에는 4계절을 그린 500호 짜리 대작도 있다.
'화가가 된건 천운'이라는 정 화백이 생각난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제 부인 최옥심씨가 최고의 후원자이자 제겐 하느님입니다. 부인이 없었으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겁니다. 집안일, 자식일 신경안쓰이게 모두 야무지게 해준 제 부인에게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시는 9월2일까지.(02)734-0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