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혁4인방 체포과정 재조명

2014-08-11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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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4인방에 대한 재판장면. 앞줄 왼쪽부터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 장칭.[인터넷캡쳐]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지난 8일 중국전역에 드라마 '역사전환중의 덩샤오핑(邓小平)'의 첫회분이 방송된 이후 문화대혁명 4인방의 체포과정이 다시금 재조명받고 있다. 중국 매체들은 '중국공산당 90년역정' 중 제8권인 '문화대혁명편'을 토대로 문혁 4인방 체포과정을 전했다.

1976년 9월9일 마오쩌둥이 사망한 이후 문혁을 주도했던 4인방은 정치적 버팀목을 잃었다. 마오 사후 들어선 중공 지도부는 4인방 척결을 준비했으며 D-데이를 10월6일로 잡았다. 10월6일 저녁 6시40분 특무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은 중난하이(中南海)의 회의실인 화이런탕(懷仁堂) 각부를 접수했다. 이어 저녁 7시 화궈펑(華國鋒) 총서기와 예젠잉(葉劍英) 국방부장이 화이런탕에 도착했다. 이들은 4인방을 화이런탕에 한명씩 불러들여 체포할 계획이었다. 

7시55분 장춘차오(張春橋)가 가장 먼저 화이런탕에 도착했다. 장춘차오가 화이런탕에 들어서자마자 제1행동소조가 공손히 맞았다. 행동소조가 장춘차오가 데려온 경호원들의 진입을 제지했다. 장춘차오는 평소와 다른 상황을 인식했지만 왕둥싱의 설명을 듣고 어찌할 수 없었다. 장춘차오가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화궈펑은 체포결정문을 읽었다. 결정문은 "마오쩌둥 사망후 4인방이 서로 결탁하여 당권을 빼앗을 음모를 획책해 반당, 반사회주의의 죄를 저질렀으며, 중공중앙은 장춘차오, 황훙원, 장칭, 야오원위안 등에 대해 격리심사를 진행할 것이다"였다. 화궈펑이 결정을 읽은 후 장춘차오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고 압송되어 갔다.

뒤이어 왕훙원(王洪文)이 도착했다. 왕훙위안은 체포될 때 "나는 회의 참석하러 왔다. 너희들 뭐하는 것이냐"고 외치며 극렬히 저항했다. 제압된 이후 화궈펑은 결정문을 다시 읽었다. 왕훙위안은 화궈펑이 다 읽기 전에 예젠잉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내 곧 저지됐다.

이미 두명이 체포된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야오원위안(姚文元)은 회의실로 들어서는 복도에서 체포됐다. 경비단 부단장이 중앙결정을 읽자 야오원위안은 고개를 떨군채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체포조는 이날 저녁 8시30분 장칭(江青)의 숙소를 찾았다. 장칭체포조는 왕둥싱의 조수였던 장야오츠(张耀祠)가 이끌었다. 그는 오랜기간 중난하이 경비를 맡았던 인물이다. 장칭의 거주지에 진입해 그를 체포하려 하자 장칭은 "누가 시켰나"라고 분노했지만 화장실을 가게해달라고 부탁해 15분후에 순순히 체포됐다. 

10월6일 저녁9시경 4인방이 모두 체포된 후 화궈펑과 예젠잉은 겅뱌오(耿飚), 츠하오톈(迟浩田) 등 군부인사를 화이런탕으로 소집했으며, 그들에게 CCTV, 인민일보, 신화사, 광명일보 등을 넘겨받으라 명했다. 10년동안 중국대륙을 피바람으로 물들게 한 문화대혁명은 이렇게 총한방 쏘지 않고 피한방울 흘리지 않은 채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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